매년 10월 11일은 고려대장경이 완성된 1251년 10월 11일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출판계가 1987년에 제정한 ‘책의 날’이다. 수백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숭고한 염원을 담아 목판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던 그 거대한 지혜의 유산은, 오늘날 디지털 화면의 불빛 속에서 파편화된 정보와 자극적인 영상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202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격년 발표) 결과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연간 종합독서율(교과서, 학습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등을 제외한 일반도서를 1년간 1권 이상 읽거나 들은 비율)은 충격적이다. 성인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 즉, 성인 10명 중 6명 이상이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독서 인구 저하가 심각한 사회적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뼈아픈 현실 속에서, ‘책의 날’이 갖는 무게감은 우리에게 단순한 기념일 이상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 침묵의 시대에 오직 책을 통해 삶의 변혁을 이뤄낸 생생한 다독가들의 증언은, 왜 우리가 다시 활자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등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 각계에서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기적을 써 내려간 이들의 고백은 뭉클함을 넘어 경외감을 자아낸다. 고명환 씨(코미디언·사업가)는 수많은 고전을 읽고 철학을 체화하며 요식업계의 거물, 이른바 '장사의 신'으로 거듭났다. 그는 “책을 읽으면 고민의 90%가 사라진다”고 단언한다. 책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혼란 속에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선사하는 가장 확실한 무기라는 것이다.
박소령 퍼블리 대표는 콘텐츠가 사람과 세상을 바꾼다고 믿으며 독서를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정의하고 있다. 타인의 사유를 흡수하며 주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이 곧 독서라는 뜻이다. 불혹의 나이에 비로소 책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젖혔다는 유재덕 셰프는 “책은 내 인생 최고의 무기”라 부르고 있다. 늦깎이 독서가 가져다준 내공은 거친 주방의 현장에서 그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철학 있는 요식업자로 우뚝 서게 했다.
그뿐이랴. 음악의 선율 속에 문학적 감성을 녹여내는 김송현 피아니스트는 “독서는 기쁨이자 은신처이고,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것”이라 고백하고 있다. 메마른 현실에서 영혼이 쉴 수 있는 가장 깊은 안식처가 바로 책이라는 방증이다.
필자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대학 입시 지도에 전념하던 상태에서 한때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라는 책을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변화에 자극되어 독서에의 관심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하루 1권 읽기라는 과도한 목표를 정해 밤잠을 설치고, 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학생들의 심야 자율학습 시간까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나타난 긍정적인 효과는 어느 순간 뇌의 지각 변동을 느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난 이후에도 머리는 항상 열려 있어 즉시 무엇을 하더라도 생각이 바로 연계되는 효과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이는 체력이 뒷받침되던 비교적 젊은 날의 이력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읽은 책은 그 숫자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오늘날 1300편 정도의 칼럼을 다양한 매체에 지속적으로 쓰는 지력(知力)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감히 고백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에서 언급한 통계가 보여주는 오늘의 대한민국 독서 실태는 참담하다. 이는 시대적으로 짧은 숏폼 콘텐츠와 자극적인 알고리즘이 청소년과 성인의 뇌를 지배하면서, 깊게 생각하고 오랜 시간 문장을 음미하는 능력(문해력)이 급격히 퇴화하고 있음이다. 활자를 멀리하는 사회는 곧 깊은 사유를 포기한 사회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는 민주적 대화의 기술,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돌파하는 창의적 통찰력은 모두 깊이 있는 독서라는 토양 위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풍토를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 지적 자산을 스스로 갉아먹는 치명적인 낭비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뇌 썪음‘ 현상을 재촉하는 길이기도 하다.
다행히 올해 교육 당국을 비롯한 각계에서는 독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적극적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정적 캠페인이나 수치 채우기식 권장에 머물러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입시 중심의 독서에서 ’자발적 사유의 독서‘로의 전환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스펙용 독서나 줄거리 암기식 교육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저자와 대화하고,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진정한 ’마음의 독서‘를 경험하게 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가정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읽기 문화 조성이다. 어른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책을 손에 쥐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가족이 함께 책을 읽는 독서 시간이나 마을 도서관 중심의 커뮤니티가 일상의 문화로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셋째, 디지털 디톡스와 아날로그 활자의 복원이다. 미디어에 노출된 청소년들에게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온전히 종이책과 마주하며 침묵 속에서 사색하는 ’고요한 시간‘, ’명상의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줘야 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의 유산 고려대장경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 오늘날까지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거대한 활자 속에 담긴 인류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지혜가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코미디언, CEO, 셰프, 피아니스트, 의사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기적을 써 내려간 다독가들의 증언처럼, 책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할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도구다.
책의 날’을 맞고 또 보내며, 우리는 각자도생의 메마른 경쟁과 디지털의 소음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책장을 펼쳐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빌려와 나의 영혼을 살찌우는 위대한 기적이다. 교육의 힘으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따뜻한 독서 운동으로 대한민국 전국에 다시 활자의 꽃이 피어나는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