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환점에서 만난 타임 리프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인공 곤노 마코토는 명랑한 열일곱 살 소녀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서 턱걸이로 지각을 면해도 등굣길을 나서는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마코토에게는 늘 장난을 거는 유쾌한 치아키와 어른스러운 모범생 고스케라는 듬직한 두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면 세 사람만의 즐거운 야구연습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푸르디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교정, 파란 하늘이 눈부신 여름. 청춘의 가장 빛나는 한 때를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인생의 심각한 고민 따위는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마코토에게도 결정과 선택의 시간이 찾아온다. 선생님은 문과냐, 이과냐 진로를 묻고 단짝 친구 치아키와 고스케에게는 그들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좋았던 소녀의 시간은, 이제 반환점을 만난 것이다.
7월 13일. 일본어 발음으로 ‘나이스 데이’라 불리는 날 마코토는 턱걸이로 지각을 면하고 하루 종일 의도치 않은 불운한 일들을 겪는다. 가사 실습 시간엔 그녀의 프라이팬에 불이 붙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친구랑 교정을 걸어가는데 난데없이 공이 날아와 머리에 맞는다. 그리고 방과 후 들린 과학실 구석에서 호두처럼 생긴 이상한 물체 위로 넘어져 신비한 현상을 본다.
그 날 하굣길, 비탈길을 달리던 마코토의 자전거는 철도 건널목의 차단기를 뛰어 넘어 기차와 부딪힌다. “설마 죽겠냐 했는데 죽는구나.” 다음 순간 마코토는 자신이 시간을 뛰어넘어(time leap) 살아 있음을 발견한다. 신기한 능력이 생긴 것에 신바람이 난 소녀는 그 날 이후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자주 달리게 된다(있는 힘껏 달려야만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또 다른 의미 갖는 되돌려진 과거시간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에 맛을 들여 버린 마코토는 시간을 되돌려 쪽지시험을 다시 보고, 맛있었던 철판구이를 다시 먹거나 노래방 시간을 줄기차게 연장하는 등 온갖 소소한 일상의 스릴을 만끽한다. 마코토가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듯하지만 되돌려진 과거는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내가 즐거움을 얻는 순간, 누군가는 기막힌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13일의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해 되돌아간 마코토가 타임 리프를 써서 사고를 피하는 순간, 옆에 있던 친구가 대신 다치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시간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책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횟수가 제한된 타임 리프 능력을 별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써버려서, 막상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소녀는 불현듯 성장한다. 시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갖게 된 소녀가 역설적으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미루거나 회피하지 말고 반드시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강둑에서 마코토가 치아키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이다. 뒷자리에 앉아 가던 마코토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치아키로부터 “사귀어 볼래?”라는 말을 듣는다.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한 마코토는 타임 리프의 능력을 발휘해 이전 상황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도 고백을 계속 듣게 되자 자전거를 얻어 타고 가기를 포기한다. 그렇게 치아키의 고백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감돈다. 당혹감에 빠진 마코토. 처음에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고 학교에서 치아키를 무작정 피해 다닌다. 그러던 중 치아키와 자신의 단짝 친구가 사귀게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후회한다. 왠지 가슴 한 쪽이 허전하고 기운이 빠진다.
되돌린 시간도 지울 수 없는 감정<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타임 리프를 통해 곤란한 ‘순간’을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어난 ‘사건’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시간을 뛰어 넘을 수는 있어도, 감정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떳떳하게 대면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후회와 아쉬움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계속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 즈음 또 다른 단짝 코스케도 후배 여학생의 고백을 받고, 둘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시간을 자꾸 되돌리던 마코토는 꼬여버린 시간 속에서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된다. 처음 마코토의 상의를 받고 “타임 리프란 네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끔 있는 일이야”라고 자상하게 일러줬던 이모는 중요한 교훈을 깨우쳐준다. “그런데 네가 이득 본 것만큼 손해 본 사람이 있지 않겠니?” 비로소 마코토는 사소한 하나의 행위라도 반드시 결과를 낳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에 눈뜬다.
이렇게 이 영화의 매력은 시간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그 안에서 한 소녀의 성장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소녀의 성장담은 그러나 너무 심각하지는 않다. 실수를 하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청춘의 특권이기에…. 옥상을 내달리는 경쾌한 질주와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고민하는 순수함과 함께 소녀의 타임 리프는 그 여름의 한 때를 가로지른다.
우리의 기억 속 타임 리프 순간들<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여행 자체보다 시간의 간극을 타고 펼쳐지는 사춘기 소녀의 미묘한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설레기도 하지만,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그 시기의 혼란스러운 상태는 무수히 시간을 되돌려도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자기만의 ‘타임 리프’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모의 대사처럼, 사춘기 그 시절에는 누구나 타임 리프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 매일 써내려간 일기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기억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타임 리프 순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츠츠이 야스타카의 단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1965년 발표된 이래 40여 년간 일본에서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아온 성장소설이다.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요시야마 카즈코는 이 영화에서 35세의 노처녀이자 미술품 복원가로 일하는, 마코토의 이모 캐릭터로 등장한다. 마코토에게 “아, 그거 타임리프라는 거야”라며 느긋하게 답해주는 이모도 한 때는 시간을 달리던 소녀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시간의 비밀을 깨우친 채 어른이 되어버린 그녀는 마코토에게 있어 인생의 선배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조카의 비밀을 공유하고 다독거려 주는가 하면, 시간여행을 남용하는 행동을 나무라고, 과거의 사랑을 돌아보며 후회하기도 한다. “그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오래돼버렸네. 사실 오래 걸리진 않았어. 순식간이었지.” 하지만 후회가 전부는 아니다. “마코토는 나 같은 성격이 아니잖아. 누가 늦으면 먼저 만나러 달려가는 게 너잖니?” 신세대의 적극성을 예찬하는 이모의 이 말에는 마코토를 향한 부러움과 기대가 담겨있다.
일상에 감춰지는 성장 속의 비밀덜렁거리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소녀 마코토. 자신에게 갑자기 생겨난 이상한 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대신, 순간순간을 즐기며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타임 리프를 사용하는 낙천적인 신세대 캐릭터다. 그런데 시간 사이로 숨차게 뛰어다니는 마코토의 무모하고도 진심어린 모습에 내가 지나온 그때 그 시절이 겹쳐지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감독은 마코토의 일상을 통해 성장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던 등굣길, 수업이 한창인 교실, 친구들과 뛰어놀던 운동장,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같은 공간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 그래서 매순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감독의 목소리는 마음을 두드린다. 진지함과 유쾌함 사이를 오가며 그 시절을 행복한 미소로 추억하게 만든다.
인생의 그 많은 사건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와 오해 속에서 우리는 갈팡질팡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 마코토는 미숙하지만 아직 젊기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미래를 향해 씩씩하게 달려갈 수 있다. 마코토가 잠시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세상을 새롭게 느끼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 어느새 ‘성장’이란 세월의 선물이 소녀를 찾아온다. 그렇게 끊임없이 출렁대며 달려가는 시간을 지혜롭게 건너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영화 정보*제목 :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감독 : 호소다 마모루
관람등급 : 전체관람가
제작연도 :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