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따돌림, 일명 `왕따'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따돌림 현상을 교육분야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의 병리 현상으로 지적하고 있다. 입시스트레스, TV의 저질프로, 나와 다른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왜곡된 집단 주의 등 학교 외적인 요소가 맞물려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최근 들어 극성을 부리던 학교 폭력이 다소 주춤해진 대신 왕따와 같은 간접 폭력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왕따로 지목해 따돌리는 대상도 예전처럼 신체적, 정서적으로 약점을 가진 아이들에 한정되지 않고 모범생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무차별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괴롭히는 수법 역시 과거에 비해 잔인해지고 있다. `컴퍼스나 압정으로 손등 찌르기' `우유에 설사약 넣기' 등 도저히 어린 학생들이 하는 행동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왕따 피해 학생들은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물리적, 심리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에 오고 하교 후 피곤한 듯 주저앉거나 학용품 등 소지품이 자주 없어지고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가는 일이 내 자녀, 이웃 자녀가 겪는 일이 되고 있다.
심한 경우 `내가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신 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살을 택하는 사건도 벌어지고 있다. 사태가 이지경이라면 더 방치해서는 안될 일이다. 문제는 집단따돌림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당사자와 부모들이라는 사실이다. 공부 잘하고 선생님과 친한 아이가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공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거나 말수가 적고 소심한 아이들도 왕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잘난 체, 아는 체, 갖은 체 하는 아이들의 성격이 따돌림을 유발하기도 하고 외모가 지저분한 아이도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소한 사건이나 엉뚱한 소문을 계기로 몇몇 아이들이 주동을 하면 다른 아이들도 그냥 휩쓸려 따돌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유형을 낱낱이 말하기는 어렵다.
이런 아이들의 뒤에는 자녀를 왕따로 키우거나 가해학생으로 키우는 부모들이 있다.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로 자녀를 대하면 아이는 자신감 있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또 아이를 비하시켜 스스로 자신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따돌림을 받으면 헤어나지 못하고 그저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바로 이런 부모가 자신들의 아이를 왕따로 쉽게 만든다.
반대로 아이를 폭력적으로 체벌하거나 불화가 잦은 가정의 아이는 가해자가 되는 확률이 높다. 결국 따돌림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차적으로 가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 사회 전반의 협조가 조화롭게 이뤄져야 한다.
우선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사랑과 민주적인 방식으로 지도하고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민주적인 부모란 아이를 적당히 통제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의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부모를 의미한다. 또한 일관적인 태도로 아이를 대함으로써 아이의 자기 조절력을 키워주며 아이의 능력, 책임감, 독립심의 발달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 역시 민주적인 부모다. 이러한 부모를 둔 아이는 자기 확신과 자기주장이 강하며 학습에 탐구적인 자세를 보이고 학교 생활에도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반대로 부모가 성적지상주의를 강조하거나 과잉보호로 자녀를 대한다면 아이들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부에 소외된 아이들은 반발적인 행동으로서 따돌림을 재미 삼아 행하게 된다. 결국 비민주적인 부모의 가정교육이 바로 왕따의 피해자 내지는 가해자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부모들은 인식해야 한다.
또한 사회와 정부는 학교의 힘이 부족할 경우 전문가나 사회 단체를 참여시켜 학교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교육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다양한 상담교육, 인성교육, 교육과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대중매체와 정부 정책을 통해 아이들이 건전한 문화와 놀이,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제언과 계몽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물이 맑고 깨끗해졌을 때 따돌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