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반도 왕조가 중국에 '복속'했다는 것과 조공(朝貢)을 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는 말은 언뜻 보면 그 의미는 피장파장일 것 같으나 실제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 만큼 크다.
역대 중국 왕조의 시각에서 복속이나 조공ㆍ책봉이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중국 왕조야 항상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중화주의는 중국(中國)을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하므로 그 중심인 천자는 모든 천하(天下)가 통치 영역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중화(中華)의 중심이 아니라 그런 중화의 '통치'를 받는 대상이라는 시각에서는 중국과의 관계가 복속인가, 아니면 조공ㆍ책봉인가는 차이가 크다.
이런 점에서 일본 후소샤본 역사교과서가 하고 각종 사서에서 중국과 이웃 왕조간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널리 쓰이는 조공이나 책봉과 같은 용어를 버리고 굳이 역대 한반도-중국 왕조 관계를 '복속'으로 규정하려 했던 데는 모종의 저의가 엿보인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2001년판 후소샤 교과서는 신라-당 관계에 대해 "신라는 당의 연호 사용을 강제 받아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했으며 조선-명ㆍ청 관계는 "중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 하에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다가 2005년도 검정본에서는 아예 이런 강제성 혹은 일방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복속(국)이라는 용어로 '개악'을 감행했다. 예컨대 신라-당 관계에 대해서는 "당나라의 복속국 위치에 있었던 신라"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조선-청 관계는 "중국 청조에 복속했던 조선은"이라고 역시 복속이라는 말을 굳이 집어넣었다.
대신 중국에 대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던 역대 중국 왕조 대 일본 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거나 교묘한 어투로 피해갔다.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강력한 수(隋) 왕조 개창에 즈음해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한반도 3국은 "수나라에 조공하였다"고 하면서 "일본도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이 요구되었다"(2005년도 검정신청본 및 합격본)고 은연 중 조공을 바친 한반도 왕조와 대비를 시키고 있다.
검정신청본에 들어있는 '복속국' 운운하는 대목은 검정 과정에서 모두 '조공'(朝貢)이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합격본도 문제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당장 합격본(34쪽)은 수(隋)나라에 대한 '일본'(日本)을 운운했으나 이는 자던 소도 깨울 만한 망발이다. 이 당시 현재의 일본열도에는 '日本'이라는 왕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日本이란 국호는 7세기 후반에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속을 대체한 조공과 책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이미 다른 곳도 아닌 일본 동양사학계의 거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말했듯이 일방적 지배-복속 관계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조공ㆍ책봉은 '기브앤드테이크'(give-and-take)의 전형이다.
이웃 왕조는 중국황제에 조공을 하는 대신에 그에 따른 보상을 엄연히 받았다.
조공을 중국에 대한 일방적인 '퍼주기 외교'로 이해하는 것은 천박한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런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럴 때 중국과 이웃 주변국가 관계는 험악하게 돌변한다.
백제-고구려를 신라와 합동으로 멸한 뒤 그곳을 직접 통치하려 했던 당에 대해 신라가 칼을 빼어 들고 '반란'을 감행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신라의 '반란'에 당 고종이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렸던지, 한반도에 축출된 다음 고종은 "신라는 그래도 바다와 격해 있어 우리를 침범할 염려는 없다"고 하는 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중국 청조에 대해 조선왕조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은 사시사철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그 때마다 인삼이며 은이며 하는 각종 조공품을 푸짐하게 싸서 보냈다. 이런 점만 부각하면 일방적인 '복속'이다.
하지만 청조는 이런 조선을 향해 "이제 그만 됐다. 짐이 너희 정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 이제 그만 보내라"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청조가 힘이 모자라 조선에 애걸을 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에서 1을 가져오면 그에 대한 답례로 청조는 2를 조선에 내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변방에 있는 작은 왕조에서 자발적으로 '복속'하겠다고 달려오는데 막을 수도 없고, 그러자니 그 답례로 가져다 바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보상품을 내려야 하니, 청조로서도 죽을 맛이었다. 조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럼에도 조공과 책봉을 둘러싼 이런 역사의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애써 외면하면서 일방적인 종속관계만을 부각케 하는 '복속(국)'이라는 용어를 애써 쓰려 한 후소샤 교과서는 그런 점에서 이 지구상에서 도태되어 마땅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