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공립 고등학교 앞, 낡은 학교 건물의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몰아치고, 부족한 교사 수로 인해 파행 운영되는 교실과 낡은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학생들은 당장 상급학교 진학과 진로에 불이익을 당하며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학교 밖으로 나와 시위의 현장을 펼쳤다.
여기에는 공교육의 질적 저하와 열악한 교육 시설 그리고 양극화된 교육 기회에 분노한 고등학생들의 국가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저마다의 가슴에 깊이 내재(內在)되어 있었다. 교사와 시민들이 공감하여 참여함으로써 순식간에 거리를 점령하고 급기야는 폭력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선진국이자 대표적 복지국가, 인권의 보루라 불리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것이라 믿기 어려운 시위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문제는 이 순수한 학생들의 저항과 공교육 정상화 요구를 틈타, 검은 옷과 복면으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극단적 아나키스트·극좌 투쟁 집단인 ‘블랙 블록(Black Bloc)’이 침투해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조직적 지도부도 없이 익명성 뒤에 숨어 화염병을 던지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이들의 폭력 사태는, 평화롭던 학생 시위를 순식간에 법과 질서가 마비된 난장판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건전한 시위의 현장이 어떻게 악화되는 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사태로 결코 가벼이 할 수없는 사회적 증후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의 대표적 언론 르몽드(Le Monde) 보도에 따르면, 파리 외곽 세느생드니(Seine-Saint-Denis) 지역 등 이민자 밀집 및 소외 계층 밀집 지역의 공교육 인프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치되어 왔다. 프랑스 교사 노조(SNES-FSU)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사 수급 난항으로 인해 연간 수십만 시간의 수업이 공백 상태로 방치되고 있으며, 교실 파손 및 난방 중단 등 기본적인 학습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학교가 속출했다.
자유와 평등, 박애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닌 ‘불평등의 세습 도구’로 전락했을 때, 청소년들이 느낀 깊은 절망감이 폭력적 분노로 분출된 것이다. 우려되는 점은 프랑스 청소년과 청년들이 체제 파괴적인 ‘블랙 블록’에 노출되는 현상은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라, ‘공공성(Publicness)의 사회적 파산’을 초래하는 비극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기회 사다리의 소멸과 체념이다. 열심히 공부해도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프랑스 청년 세대를 지배하고 있다. 공교육이 최소한의 존엄과 기회를 보장하지 못할 때, 사회 계약은 깨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둘째, 제도권 정치의 무능과 소통 단절이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합리적인 정당 정치나 정책 수립 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청년들은 극단적인 불복종과 파괴적 효능감을 제공하는 익명의 폭력 집단에 유혹받게 된다는 실증적 사례이다. 셋째, 익명성이 주는 왜곡된 연대감이다. 블랙 블록의 검은 복면은 무기력한 개인이 거대한 체제와 공권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왜곡된 영웅주의와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및 언론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제도권 진입이 차단된 약자와 청년층이 선택한 가장 야만적이고 슬픈 절규”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
프랑스 사태는 지구 반대편의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사교육비 지출과 극심한 입시 경쟁, 학령인구 감소 속에서도 심화되는 지역 간·계층 간 교육 격차, 세계 최고의 청년 자살률, 악성 민원에 의한 공교육의 추락 등 커다란 시한폭탄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 교육이 안고 있는 현실로 시선을 돌려보자.
첫째, 사교육에 의존하는 공교육의 실종이다. 프랑스가 교사 부족과 시설 열악으로 몸살을 앓는다면, 한국은 공교육의 불신을 사교육으로 메우는 기형적 구조 속에 노출되어 있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대학 타이틀과 부를 결정짓는 세습 구조는 프랑스의 세느생드니 지역이 겪는 교육 양극화와 판박이다.
둘째, 청소년 삶의 만족도 최하위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청소년 통계’ 및 OECD 삶의 질 조사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들의 학업 스트레스와 행복 지수는 지속적으로 최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청년층의 은둔형 외톨이 증가와 자살률 문제는 국가 차원의 대응책이 절실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했다. 우리에게도 문제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교육청의 사치스러운 예산 낭비로 몰아 이를 손질하려는 시도는 73% 정도의 교육공동체의 불만을 초래하고 있다. 근시안적인 정부의 조치를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에는 비가 오면 지붕이 세는 학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쪼그려 앉는 수세식 변기의 고충 때문에 생리적 현상을 참고 귀가하는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시끄러운 냉난방 기계음 때문에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학교의 교실이 아직도 부지기수다. 보건교사, 전문상담교사, 사서교사 없이 정서 위기 학생들의 관리가 부실하고 독서 국가를 지향하는 비전에 부합하게 책 한 권이라도 더 읽도록 지도하고 이끌어 줄 담당 교사가 없는 학교들은 어찌할 것인가?
첫째, 공교육의 ‘질적 만족’ 위한 국가책임제 완성이 필요하다. 부모의 소득이나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최상급의 교육 환경과 교사진을 제공받아야 한다. 수도권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간의 학교 시설 및 인프라 격차를 철저히 조사하고, 소외 지역 학교에 예산과 우수 교원을 우선 배치하는 미국식 ‘교육적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법제화해야 한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 및 심리·정서적 위기 학생을 1:1로 밀착 케어할 수 있도록 학급당 학생 수를 과감히 줄이고 전문 상담·복지 인력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둘째, 서열화된 입시 제도 탈피와 ‘수평적 다양성’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서열화 교육은 아이들을 경쟁의 마귀로 만들거나 낙오자로 내몰 뿐이다. 초·중등 교육과정을 경쟁 중심에서 ‘역량 중심 및 민주 시민 교육’으로 재편해야 한다. 대학 구조 개혁을 통해 대학 간 학점 교류와 공동 학위제를 확대하고, 학벌이 아닌 실력과 기술로 존중받는 노동 시장 환경을 교육 개혁과 병행하여 추진해야 한다.
셋째, 청소년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참여형 교육 자치’ 구축이 시급하다. 아이들을 통제의 대상이 아닌 교육의 주체로 승격시켜야 한다. 프랑스 청소년들의 폭력적 시위는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교육 정책 수립 시 청소년 의회의 의견을 의무적으로 청취하는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우리는 이 시대 넬슨 만델라를 다시 소환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파리의 거리를 매운 검은 연기와 함성은, 공교육이 무너지고 정의가 실종된 사회가 치러야 하는 혹독한 대가다. 이는 우리도 아이들의 절망적인 실태를 외면하고 교육을 승자독식시스템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에 주의를 상기해야 한다.
교육은 한 국가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자, 사회적 약자가 삶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방패라 할 수 있다. 정부와 교육 당국, 그리고 사회 전체가 교육 불평등을 끊어내는 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현 정부의 개혁 리스트에는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푸념이 교육계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 프랑스 사태를 교훈 삼아, 우리 아이들에게 ‘고통의 인내’ 대신 ‘꿈을 향한 책’을 펼쳐주는 것이 오늘날 교육 당국이 완수해야 할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책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