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이름이라고 변하지 않을쏘냐 올해 어린이날에 부산에 사는 동생 집에 놀러 갔더니 조카아이가 지구본을 선물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지구본 위에는 각 나라의 영토가 국경선을 따라 갖가지 색깔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나라 이름과 큰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무람없이 “어디 어디 좀 가리켜보렴”하고 어른 티를 냈고, 아이는 아이답게 내 앞에서 자신의 ‘대단한’ 지식을 뽐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이가 30년도 넘게 차이 나는 두 사람은 나라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나라 이름이라고 영원불변할 리는 없다. 지나간 역사를 조금만 떠올리더라도 나라 자체가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꾸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존재했던 소비에트연방이 몇 년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국경선이 끊임없이 변해왔던 것처럼 어떤 지역이나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도 역사적 필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별 의문 없이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국가의 명칭을 외우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라는 단서가 붙은 임시적이고 시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 이름도 한국어다! 국가의 명칭은 현재적일 뿐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겨나 자리를 잡고 통용될 뿐이다. 예를 들어 ‘터키’는 영어 발음에서 빌려온 음으로 표기한 나라 이름이지만, 이것을 영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Turkey의 ‘r’ 발음을 굴리지 않으면 영어권 사람과 ‘터키’라는 말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터키’는 영어와 발음이 비슷하긴 해도 엄연한 한국어인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일본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토르코’라는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자꾸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답답해진 친구는 “언니 같은 사람(?)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하고 아쉬워했다. 그렇다, 내가 터키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일본어인 ‘토르코’는 아무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투르크’나 ‘토이기(土耳其)’였다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 친구 역시 (아무리 내 발음이 유창했다고 해도) ‘터키’라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래의 나라 이름과 한자음의 나라 이름 때로는 동일한 나라인데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우리가 나라 이름을 붙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래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는 것이다. 노르웨이, 스페인, 쿠바,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베트남 같은 예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한자어로 표기된 것을 음역(音譯)하거나 의역(意譯)하는 것인데, 미국, 중국, 태국, 일본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외국의 존재를 알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조상들은 외국의 명칭을 한글 표기보다는 한자음을 빌려 표기했다. 이제는 퀴즈 문제로나 나올 법하지만, 백여 년 전 이 땅에서는 네덜란드를 화란(和蘭), 오스트리아를 오지리(奧地里),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 또는 노서아(露西亞), 독일을 덕국(德國), 필리핀을 비율빈(比律賓)이라고 썼다. 이러한 한자음 표기는 나라뿐 아니라 구라파(歐羅巴, 유럽), 아세아(亞細亞, 아시아) 같은 지역 이름이나 윤돈(倫敦, 런던), 백림(伯林, 베를린), 나성(羅城,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이들 가운데 ‘동백림(동베를린) 사건’(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가요 제목, 길옥윤 작곡)처럼 몇몇은 아직도 귀에 익은 채 남아 있기도 하지만.
나라 이름의 표기와 이미지 사이 근대 초기에 해당하는 개화기 문헌을 살펴보면 프랑스를 표기할 때 한자어의 음역인 불란서(佛蘭西)와 의역인 법국(法國)이 혼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법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불란서와 프랑스가 줄곧 사용되어 왔고, 요즘 들어서는 그나마 프랑스로 통일되어 가는 듯하다. 그런데 본래 이름인 프랑스를 그대로 프랑스라고 부를 때는 어떤 의미도 끼어들지 않지만, 한자어로 표기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佛蘭西’는 음역이기 때문에 부처, 난꽃, 서쪽이라는 이미지가 그다지 강하지 않으나, ‘法國’이라 적으면 마치 ‘법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라 이름은 그것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결합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감정이나 싫은 감정, 숭배하거나 무시하는 의도가 표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가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몽골’과 ‘몽고(蒙古)’다. 본래 몽골이라는 이름을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할 때, 우매하고 낡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를 갖다 붙임으로써 몽골이 뒤떨어진 곳이라는 이미지를 낳고 말았다. 몽골을 ‘몽고’라고 한 것은 결국 몽골을 오랑캐 나라로 낮추어 본 중화주의 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 아름다운 나라? 나라 이름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 중 하나는 ‘미국’이다. 미국은 주지하다시피 해방 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로 손꼽힌다. 한미 FTA를 비롯하여 최근에는 온 나라를 ‘촛불집회’로 후끈 달군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통해 새삼스레 한국 사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더 나은 삶의 표상으로서 보통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켰던 시절에 ‘美國’은 그야말로 이름에 걸맞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나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사회의 일각에서는 반미의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고, 나아가 한국의 고도경제성장과 더불어 무역 마찰이 표면화되면서 미국의 이미지는 일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2002년에는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가 ‘미국 국가명 한자 바꾸기 운동’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美國’을 ‘米國’으로 바꾸자는 이 제안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에는 美國의 유래를 간결하게 더듬어본 ‘美國과 米國’이라는 칼럼이 실렸고(2002. 4. 16), 이 칼럼에 대해 오마이뉴스의 조정희 기자가 ‘허점투성이 이규태 코너’라는 글을 통해 조목조목 반박을 펼쳤다. 이규태의 칼럼이 객관적인 고증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증적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2002. 4. 21~30,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름다운 나라와 쌀의 나라 오늘날 중국과 한국은 ‘美國’, 일본은 ‘米國’이라는 표기를 선택하고 있다. 청나라와 미국이 처음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44년의 왕샤(望厦)조약을 통해서인데, 이 조약 첫머리에 ‘The United States of America’가 ‘亞美理駕洲大合衆國’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여기서 America를 중국식 음을 빌려 나타낸 야메이리지아(亞美理駕)란 말에 ‘美’란 글자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1854년에 체결한 일미화친 조약에서 는 미국을 ‘亞墨利加合衆國’으로 표기하여 ‘米’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에도시대에 간행된 <일포사서(日葡辭書)>(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에는 米國을 ‘쌀이 풍부한 나라’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여기서 전하여 ‘米’는 亞米利加의 약어(略語)라고 되어 있다(<일본국어대사전>, 小學館).
옛 문헌을 살펴볼 때 米國보다는 美國이 훨씬 더 앞 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米國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표기임이 분명하다. 1900년대 중반의 교과서만 해도 美國과 米國을 함께 썼다고 하니, 아무래도 개화기 이후 일본의 영향이 개입하면서 米國이라는 표기가 점점 힘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그리고 해방 직후까지도 공존하던 美國과 米國은 그 후 美國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반미 감정의 골이 깊어지거나 더 이상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고 표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일반화된다면 美國이라는 표기를 버려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인을 만난 우리 조상은 미국 선원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다가 ‘America’라는 말을 듣고 ‘며리계’라고 받아 적었다고 한다. ‘며리계’라는 말에는 오로지 먼 곳에서 온 낯설고 신기한 손님에 대한 환대의 마음만이 깃들어 있지 않았을까 몰래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