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4주년.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강요 당했던 굴욕의 한국교육사가 반세기를 진화해 왔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는 등 왜색을 씻어내고 교육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조금씩 이뤄졌다. 그러나 아직도 지시, 감독, 통제 위주의 군국주의적 교육행태가 곳곳에 남아 있다. 열린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학교가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시·감독 위주의 장학=한국교육개발원 윤종혁 연구원은 "일제시대에는 교직원과 생도(학생)에 대한 사상통제, 감시, 감독을 맡았던 시학관을 뒀는데 현재의 장학관 제도는 이런 시학관의 성격을 일부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제는 총독부에 시학관, 각 도에 도 시학관 등을 두다가 38년부터는 교학관으로 기능을 강화, 학교교육의 전 영역을 시찰하고 통제했다. 시학관은 학교운영, 시설 등 전반을 시찰할 수 있었고 시찰시 교사에게 수업을 시키거나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할 수도 있었다.
시학·교학관은 학사시찰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여한 교원과 학생, 민족교육을 하는 교사들을 체포, 고문, 투옥시키도록 조치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만 지원보다는 통제·감독 위주의 현 장학제도는 시학관제도를 닮았다고 할 만하다.
▲공문서 제일주의=잡무의 상징이 돼버린 각종 보고·지시공문과 장부들도 일제잔재다. 황국신민을 양성하기 위해 교사, 학생들의 모든 생활과 생각까지 통제했던 조선총독부는 학교, 교사, 학생에 대한 모든 사항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보고사항은 즉보(교원 숙소 조사서, 학생사건, 교직원 사상 사건 등), 월보(전월 교원·학생·학급수, 학교 청결위생 상황, 예산집행 상황표 등), 월별 보고(학급편성표, 학교경영안, 직원 신체검사표 등), 연보(기념식수 상황조사, 학교경비표 등)로 구분돼 수백, 수천가지가 예규화 돼 학교에 시달됐다.
일제는 또 교과과정부터 학사 운영까지 모든 부분에 대한 승인, 인가, 취소권을 행사하며 학교를 통제했다. 일례로 사립 동래동명학교에 시달됐던 수학여행, 교가와 교훈, 교기에 대한 지침에 따르면 숙박 여부, 교기 제작방법과 비용 등 사소한 부분까지 도장관(현재의 도지사)에게 보고, 인가를 받거나 도청과 협의하도록 지시했다.
학교와 교사가 자율적으로 해도 될 일까지 지시·보고 공문을 보내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공문행정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교사·학생 동원=일제시대에는 각종 행사에 교사, 학생을 동원하는 일이 많았다. 학도병 출정식이나 위문품 발송식, 신사참배에 모든 학생과 교사가 나가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다. 또 일본 천황의 근영이 학교를 도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때마다 교사, 학생들은 며칠씩 연습을 하며 천황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와같은 교사·학생 동원은 30∼40년대에 특히 심했는데 당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 따르면 학과시간의 절반을 행사동원으로 허비했다고 한다. 현재도 일부 시·도와 학교에서는 교사·학생들을 동원해 반강제적 거리캠페인을 벌여 불만을 사고 있다. 또 교육부나 교육청, 정부기관에서 실시하는 토론회 등에 교사가 자리를 메우는 일이 허다하다. 이는 교사와 학생을 군인처럼 맘대로 부릴 수 있다는 일본 군국주의와 다를게 없다.
▲일본동요=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전래동요 중에는 일본동요인 경우가 많다. 89년부터 초등교 '즐거운 생활'에 수록된 '줄넘기'는 실제로 일본 전래동요 '톤톤톤 도나타'와 선율만 약간 다를 뿐 가사와 놀이방법이 똑같다. 191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노래가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우리 것으로 눌러앉은 것이다.
'쎄쎄쎄 아침바람 찬 바람에 울고가는 저 기러기-' 역시 일본동요 '쎄쎄쎄'와 비슷하다. 이 노래는 92년부터 재외국민용 초등 교과서에 실려 해외동포들의 국어교육에 쓰이고 있다. 이밖에 '숨바꼭질 할 사람 여기 붙어라'도 일본동요와 음이 똑같다.
▲일본식 표현=초중고교 교과서에는 우리 말로 고쳐야 할 일본식 표기가 수두룩하다. 사실 그 말이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예를 들면 철자법은 맞춤법, 표음문자는 소리글자, 방언은 사투리, 등삼각형과 입방체는 정삼각형과 육면체, 성좌는 별자리, 기포는 거품, 대퇴부는 넓적다리, 조수는 바닷물의 일본식 표기로 고쳐야 할 것들이다. 이외에도 교과서에는 우리말로 고쳐야 할 말들이 수백 가지가 넘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있다.
▲학교·반 명칭='중앙' '동서남북' 등 방위표시가 들어간 학교 이름도 일제잔재다.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이 다니는 학교를 구분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인 학교에는 '서' '남' '북'자를, 일본인 학교에는 '중앙'과 일본을 암시하는 '동'자를 붙였다.
현재까지도 교명에 동서남북 등 방위표시가 있는 학교는 초·중·고를 합쳐 7∼8백여개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해 지방 교육계는 향토색을 살린 새 이름을 짓자는 의견이 제기돼 개명작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현재 1반, 2반, 3반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학급명도 일제잔재 중 하나다. 요즘은 사슴반, 장미반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극히 일부일뿐이다.
▲중앙현관 통제·애국조회=어느 학교나 있는 중앙현관은 시끄럽고 지저분해진다는 이유에서 아이들이 다닐 수 없다. 아직도 학교 조회시간에는 '중앙현관, 중앙계단 출입금지'가 단골메뉴일 정도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이 다닐 수 없는 길이 왜 있을까. 이는 학생들에게 질서와 정숙, 침묵, 복종을 강요했던 일제 황국신민 교육의 일환이었다.
월요일마다 운동장이나 교실에서 실시하는 애국조회는 태평양전쟁 때 등장한 아침조회에서 유래한다. 일본의 식민으로서 메이지 일왕의 가르침과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신을 반복주입할 목적으로 강압적으로 참석해야 했던 '월요 연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