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에서 책읽기-다시 천 개의 고원을 오르며

2020.10.15 10:05:22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개울물 소리가 여물어지고, 그 곁으로 은빛 머리를 날리는 억새는 무심한 얼굴로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몇 권의 책을 읽으며 긴 연휴를 보냈지만 글쓰기가 되지 않습니다. 글쓰기가 되지 않는 날에는 제가 사랑하는 풍경을 생각합니다. 맨발로 오르는 산길, 조금씩 색이 변하는 신갈나무 숲, 짙은 향기를 풍기는 은목서나무꽃, 방울벌레 소리가 들리는 저녁.

 

결국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한여름을 온통 투자하였던 책, 저의 마음을 간질간질거리며 이해가 될 듯 말 듯 놀리던 책, 쳐다만 보아도 제 가슴이 뛰는 책, 그리고 다시 시작한 책을 선택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가 공동으로 쓴 『천 개의 고원』입니다.^^

 

이 책을 펼치면 이런 조언이 있습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속편이자 완결편으로서 첫째 권은 『안티-오디푸스』였다. 이 책은 장이 아니라고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론을 제외하고 각 고원들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철학 서적과 달리 순서를 지키기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책을 ‘성서’처럼 떠받을 것이 아니라 무기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더 많은 도구-무기를 끄집어내는 것도 책을 잘 읽는 일일 것입니다. 대단한 분들입니다.

 

서론인 제1편 ‘리좀’은 책 전체의 압축입니다. 리좀은 나무에 대비됩니다. 나무가 세상의 예정된 질서라면, 리좀은 발견의 대상이며 세상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로 소개됩니다. 리좀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며 무한한 연결 접속을 창조해낼 수 있는 내재적 원리입니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중략>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할 수 있고 또 연결접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pp.18~19

 

원리3. 다양체의 원리: 다양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하나>와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게 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나무 모양을 한 가짜 다양체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중략>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pp.20~21

 

『천 개의 고원』 속에는 다양체, 인상적인 동물–되기의 방식, 고원을 가로지르는 영토들과 탈영토 된 단계, 유목민의 전쟁기계 등의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이 배치되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고원을 다시 오르며 수많은 좌절과 이따금 선물처럼 주어지는 기쁨을 마주할 것입니다. 제가 힘겹게 오르는 고원의 소식을 가끔 전해드리겠습니다.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이선애 수필가, 경남 지정중 교사 sosod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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