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을 처음 거론한 회담이 바로 카이로 회담이다.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지금은 잊힌 역사의 한 장면이 된 듯하다.
카이로 회담은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승리를 확신한 연합국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장제스(蔣介石)가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2차 세계대전 전쟁 작전 수행과 전후처리에 대하여 논의한 군사 회담이었다. 카이로 회담 이후 루스벨트와 처칠이 테헤란으로 이동해 스탈린과 가진 회담에서 전시 작전과 노르망디상륙작전을 결정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결의한 카이로 선언에 동의해 12월 1일 공식 발표됐다.
대한민국 독립을 보장한 첫 회담
이 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자유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로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연합국에 의해 보장됐다.
올해는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8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된 ‘카이로 선언 80주년에 다시 보는 동아시아’에서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카이로 선언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이 쉽지 않았을 수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은 비밀리에 미국에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유지해주면 종전할 생각이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카이로 선언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명시했기 때문에 그런 협상을 받을 수 없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카이로 선언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련이 먼저 한국 독립을 승인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적극적이었던 측면도 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제스를 직접 만나 외교를 벌인 것이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장제스를 설득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다. 그 근거는 바로 김구가 쓴 ‘도왜실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왜실기’는 김구가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 등 한인애국단 의혈 투쟁을 중국어로 쓴 책이다. 이 책은 1946년에 엄항섭이 자료를 보충하고 한국어로 번역해 국내판을 간행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의 원인이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고 쓰고 있다. 즉,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중국 정부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으며, 장제스가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한 것이다.
매헌 의거로 중국 후원 이끌어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이것은 결코 기적이거나 신화가 아니며, 자랑스러운 윤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순국을 통해 연합국의 협조를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구어낸 성공의 역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자라나는 학생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카이로 선언이 더욱 선양되고 전파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