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미래 교육의 유일한 상수(常數)는 변화”임을 강조했다. 그렇다. 한마디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보니 이젠 삶의 어느 한 영역에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는 과거의 관점과 현시대의 관점, 그리고 미래의 관점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교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교사의 역할도 변화했다. 표준화를 강조하던 테일러주의(Taylorism), 또는 포드주의(Fordism)가 출연한 이후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인생에서 성공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성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매년 신임 교사들이 처음에는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이 성공하도록 돕는 일을 열심히 하지만 결국 교육이 본질과 시스템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교사는 아이들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이는 교사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교사들은 이러한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교육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교사는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시험에서 기적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
“평생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걷기하세요.” 이 말은 필자가 한때 달리기를 통해 건강을 지키고자 할 때 무릎 통증이 찾아와 병원 치료를 받을 당시 의사가 한 말이다. 그래서 몸에 무리가 가는 달리기 대신에 전문가의 처방에 따라 걷기를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 하던가. 직장 일에 따른 불규칙한 생활로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그래도 주말이면 다른 일보다 우선하여 아내와 함께 동네 공원을 산책하거나 호수공원을 오가며 걷기를 자주 했다. 걷는 날과 쉬는 날은 확실히 몸에 차이를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올해 인생 60인 환갑을 맞이하였다. 자녀들이 축하와 함께 생일상을 차려줄 때 ‘인생은 60부터!’라는 격려의 현수막을 만들어주었는데 이는 필자의 집 거실 벽에서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어느 주말, 동네 공원을 걸을 때였다. 2020년 코로나19 대응 언택트 나 혼자 만보 걷기 캠페인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망설임 없이 참여 신청을 해서 처음의 각오대로 12주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제는 걷기 예찬론자가 되었다. 참으로 작은 성취를 통해 자신감의 확보와 건강관리,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 일석삼조의
인류는 지금 전례 없는 혁명기에 직면해 있다. 특히나 Covid-19라는 감염병으로부터 생사를 가르는 투쟁을 벌이며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절대적인 순간에 직면해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극히 두려움과 불안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옛날이야기는 다 무너져내리고 전례 없는 변혁과 뿌리째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 자신과 지금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대비시켜야 할까? 아이들은 인생 100세 시대를 살아가면서 22세기에도 활발한 시민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이런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그들이 일자리를 얻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미로 같은 인생을 헤쳐나가려면 어떤 종류의 능력이 필요할까? 교육하는 사람으로 직업적인 생리에 따라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면서 필자는 21세기의 석학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란 책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미래의 세상이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두에서 제기한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물론 과거에도 인간은 미
“교사가 된 것은 잘한 것인가?” 이는 세상을 살면서 한동안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솔직히 순간순간마다 한때 우리나라 경영계의 구루(guru)가 말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에 집착을 한 적이 있었다. 교사로서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나이의 아이들과의 지적, 인적 교류를 나누면서 생활하는 것에 크게 회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갑갑한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저 멀리 넓은 미지의 세상에 도전하고 싶은 눈길을 보내며 마음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특히 어느 순간 이후, 급격히 추락한 교권과 학교 현장에서의 실망스러운 사건, 사고들을 접할 시에는 더욱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페르소나라는 직업의 가면을 쓰고 무대 위의 배우가 되어 열정적으로 연기를 해왔다. 그러다보니 다시는 연출하기 힘든 젊은 시절의 열정과 헌신을 뒤로 한 채 어느덧 교직에서 36년이나 되었다. 여기엔 평생소원으로 자식을 교육자로 만들기 위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으로 뒷바라지 하시며 길지 않은 삶을 사신 두 분의 부모님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시인의 마음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성숙함으로 스스로 되새기는 말이 생겼다. 그것은 다
과거나 지금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크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린 학생들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단연 선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때 직업 선호도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곤 하였다. 경험이 많지 않고 또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미치는 교사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마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거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효능을 증거하리라 믿는다.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부모님이라고 대답하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작 선호의 당사자인 교사는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열정을 다할까? 또한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당당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있을까? 필자 또한 교사로 살아가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에 얼마나 주저 없이 답하는지 성가신 물음의 시간을 가져본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자신이 쥐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청년에게는 무척 심각한 정신적 문제였다. 장기간 입원 치료 후 그는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을 나서던 청년은 혼비백산 사색이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Thomas Frey)는 “미래가 현재를 만든다(The future creates the present)”고 하였다. 즉,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여 현재의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이 미래를 위한 현재보다는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이는 학생 자신의 미래보다 현재의 타 학생과 비교하여 우월하도록 조장하는 제도 때문이다. 부연하면 과거의 제도 속에 얽매여 미래를 향한 도약에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대학입학시험을 위한 내신 성적과 상대평가에 준거한 수학능력시험이요 미래는 학생의 선택권을 중시하여 학점제 운영으로 고교졸업 자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고교학점제 운영에 빗대어 말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과거의 입시제도와 미래를 꿈꾸는 고교학점제 청사진이 모두 현재의 학교생활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교육은 학생이 과거보다는 미래의 행복하고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교학점제 운영과 더불어 학생들이 즐겁고 행복한 배움을 통해 학교생활을 병행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에 본교의 2020학
우리 사회의 건물 중에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곳이 어디일까? 도서관? 행정 기관? 대형 마트? 병원? 교도소? ... 물론 이런 건물들이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눈에 띈다. 그러나 학교 건물은 단연코 앞선다. 왜냐면 공장과 같은 획일화된 사각형 건물로 비교적 넓은 운동장 부지를 가진 것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마치 군대의 막사나 교도소, 수용소의 건물과 비교되듯 규격화되고 단편적이며 재래식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건물로서의 개성과 매력이 없는 일본제국시대의 건물로 다소 혐오 시설과 다름이 없다. 그런 건물이기에 내부의 교실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특히 학교의 역사가 오랜 건물일수록 그 정도는 심하다. 오죽하면 한때 그 속에서 생활하는 학생이나 교사들이 자존심을 접고 “○○공장”이라거나 “○○교도소”라고 칭했을까? 그런 학교의 모습이 이젠 변하고 있다. 정부는 노후화된 학교 건물에 대해서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이란 명목으로 새롭게 탈바꿈을 지원하고 있다. 그 배경엔 지난 7월 한국판 뉴딜 정책 발표와 그린스마트 미래학교의 10대 핵심 과제 선정으로 학교 공간의 혁신과 디지털 및 친환경 기반 학교 전환에
요즘 젊은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로 갔을까? 이 무슨 마른하늘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가? 어제도 오늘도 미래에도 젊은이들은 존재할 것인데 말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젊은이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는 생물학적으로 젊은 연령층의 청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젊은 마음’, 즉 ‘청년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애늙은이’, 기가 빠진 노인네인 젊은이들을 흔하게 마주친다. 누가 ‘애늙은이’인가?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어린이, 청소년, 20대이지만 말투, 행동, 외모, 생각하는 것이나 가치관, 또는 정신연령이나 취미 등이 또래들과는 다르게 중년 이상의 나이대와 비슷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현실에서 우리 주변에는 꿈도 없고 도전정신도 없는 젊은이들을 흔하게 발견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초고령사회(65세 이상이 20%를 넘는 사회)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너무도 빠르게 고령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전에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서울 노량진 ‘공시촌’을 찾아 하루 15시간씩 공부한다는 청년들을 만난 후, “10대들의 꿈이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얼마 전 가을의 문턱까지 잦은 태풍이 불어와 온 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뒤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정부에 의해서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이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이른다. 하루아침에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된 농민들의 이마에는 주름이 펴질 날이 없다. 그뿐이랴. 도시에선 코로나19로 인해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휴업 상태로 힘겨워하는 가운데 영세 자영업자들도 생계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버거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2~3단계 사이를 오가며 생계를 압박하니 차라리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조 섞인 말이 현실의 무게감을 가증시키고 있다. 삶은 원래 힘든 일이라고 문학에서는 두루 밝히고 있다. 일본의 저명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쿠사마쿠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치를 따지면 모가 나고, 정에 치우치면 휩쓸리고, 고집을 피우면 옹색해진다. 이래저래, 사람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사람의 세상은 이처럼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뿐이랴. 단테의 《신곡》 첫 부분 “인생을 절반쯤 살았을 무렵,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 거칠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받는 장학금은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부 학생에게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누군가 따뜻한 도움의 손길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이를 계기로 학습에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에게는 탁월한 능력에 대한 인정과 보상, 더욱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를 내포한다. 장학금으로 인해서 학생에게는 평생을 잊지 못할 자긍심과 함께 사회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나중에 자신이 또 다른 기부자가 되어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선순환의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왜냐면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더 잘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낌없이 오고 가는 그런 사회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반 주택과 혼재하는 최근의 개발 현장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계양 신도시 후보지가 있으며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부천 대장동 신도시 후보지가 위치하는 곳이다. 그래서 인구 이동이 많은 곳에 오랜 전통시장이 함께 하며 비교적 상권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에는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소상인들의 눈물겨운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