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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기고] 겸손 그 자체였던 현승종 선생님

제24대 한국교총 회장이었던 현승종 전 국무총리의 부음을 접하면서 머리에 우선 떠오른 것은 ‘겸허’ 또는 ‘겸손’이었다. 필자는 자신의 분에 넘치게도 적어도 30년 가까이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일하며 배운 경험을 여러 차례 가졌는데, 그 과정에서 “세상에 이렇게 겸손이 몸에 밴 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하는 느낌을 갖곤 했다. 자신보다 수십 년 아래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 심부름이나 전화 심부름하는 젊은 여성에게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언제나 존댓말을 썼다. 자신을 내세울 일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선생님이 자기 자랑하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거기에서 위선의 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전형적인 훌륭한 선비의 몸가짐이었다. 필자는 선생님의 겸손에 접할 때마다 그러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도산 안창호를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과 같은 평안도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 도산은 어느 무엇보다 ‘인격혁명’을 내세웠다. 조선인 또는 한인 모두가 끊임없는 인간수양을 통해 인격혁명을 성취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친 도산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아마 동향 선배로부터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은 과묵하셨다.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때로는 어눌하게 느껴졌다. ‘재기’ 또는 ‘재치’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수룩한 분위기를 자아내셨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겸허한 인간’ ‘겸손한 사람’ ‘어수룩한 사람’이라고 하면 ‘뭔가 물러터진 사람’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결코 ‘물러터진 사람’이 아니었다. 원리원칙과 법에 엄격해, 그것에 어긋났다 하면 크게 나무람했고, 그 어긋남이 어느 선을 넘었다 싶으면 엄격하게 처리하셨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12월에 치러질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3개월 앞두고 대선을 불편부당하며 공정하게 실시하겠다는 취지에서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중립내각 구성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국무총리로 선생님을 모신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몇 차례 사양하다가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여 취임한 뒤 공명선거의 실현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대선이 끝난 뒤 어느 쪽으로부터도 시비가 전혀 없었다.

 

선생님에게 걷기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여러 곳에서 장(長)을 지냈기에 흔히 말하는 ‘기사가 모시는 승용차’가 배당됐으나 승용차를 이용하기보다 걷기를 택했고 걷기가 힘에 부칠 때는 지하철을 택해 조금이라도 더 걷고자 했다. 젊은 시절부터 등산을 자주 했기에 연세가 높아진 뒤에도 걷는 것이 수월했다. 101세까지 수를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고 믿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사생활에서도 아무런 흠이 없었다. 만년에 치매에 시달린 사모님이 가까이 지냈던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한 상황에서도 선생님만큼은 알아보았고, 선생님이 밥상 앞에 앉아계시면 꼭 식사를 했다는 일화, 그래서 선생님도 자신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식사시간에는 꼭 귀가를 했다는 일화는 부부관계가 얼마나 좋았던가를 말해준다.

 

선생님이 한림대학교 법인인 일송학원 이사장으로 봉직하던 때 필자는 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몇 해 전 이사회 때의 일이다. 이사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기억력이 아주 좋기로 정평이 있는 선생님으로부터 같은 이야기가 세 번 네 번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모두 “나이 앞에 장사 없다는데, 90이 넘으시니 선생님도 어쩔 수 없구나”하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선생님은 여러 공직을 맡으면서 자신이 맡았던 그 기관들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셨다. 우리 교총을 위해서도 그리고 교육계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를 위해 크게 헌신하셨다. 그러한 공로의 바탕에 훌륭한 인품이 있었음을 상기할 때,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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