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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경영

올바른 상식과 지식의 상기

플라톤의 교육론 ②

교사와 학생의 학교활동은 교육과 학습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 간명해 보이지만 이 과정은 파고들수록 의문스럽다. 교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물론 교과내용과 교과교육 전반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수준과 성향의 학생들을 다룰 수 있는 경험도 갖고 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는 난항을 겪게 된다.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지 자문해보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사실 모든 교사가 교과영역에서 시인·동시통역사·물리학자·화가·올림픽 출전 선수일 수 없고, 학교 교육에서 그 정도 수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는 교사들의 반성은 때로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자격과 능력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거나 학교 밖 불청객들의 공격에 자존감을 잃고 무력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학습을 위한 조건, ‘내가 부족하다’는 자기인식

학교에서 학생은 학습의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하지만 학습을 위해서는 ‘내가 부족하다’는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는데 굳이 더 채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자존감 결여’와는 다르다.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수준 높은 자기존중이자 고차원적 메타인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지자는 알고 있기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무지자는 지혜가 왜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지혜를 추구할 수 없다(Symposion, 204a)’는 향연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과 무지한 사람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와 같은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론을 적용하려다 보면 으레 철학자와 이데아론을 떠올리다 벽에 부딪히게 된다. 철학자는 수십 년의 선별과 수련을 거쳐 완성된 극소수의 인물이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좋음의 이데아는 진리의 핵심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숙련된 교사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론은 어쩌면 플라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르지 못했을 법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안도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그 자격이 보장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플라톤의 답변은 모든 사람이 철학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의견(alethes doxa) 즉, 상식에는 도달할 수 있다고 평가하며 교사들의 교육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올바른 의견은 진리(aletheia)와 의견(doxa)의 합성어이다. 올바르긴 하지만 여전히 의견이다. 따라서 이 상태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아는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안다’와 ‘아무것도 모른다’ 사이에 많은 지식이 숨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재단할 필요는 없다. 대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며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의 지혜를 전달하고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매진해야 한다. 장차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방향인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아마 혼돈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다만 우리의 지향점이 진리라는 삶의 대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여정이 힘들 수는 있어도 난파하거나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전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식견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상식적인 사람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교사들이 철학자의 경지를 향해 매진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실력과 인품을 갖춰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사의 자격, 올바른 의견 ‘상식’이 있는 자

상식, 또는 올바른 의견으로 번역하는 alethes doxa의 aletheia(진리)에 대해 철학자 하이데거는 비은폐성(Un-Verborgenheit), 다시 말해 그동안 가려진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플라톤의 학습이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상기(想起)’는 전생에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생을 믿었는지는 현대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휴대폰을 초기화해도 그 안에 수많은 과거 데이터들이 여전히 남아있듯이 플라톤은 인간의 기억과 학습, 그리고 각성에 신비로움을 부여한다. 레테(L?th?)는 망각의 강을 가리킨다. 저승에 들어갈 때 이 강물을 마시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생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음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학습은 ‘지식의 주입’이나 ‘경험의 재구성’과 같은 의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주요 학습이론과 견주어볼 때 상기(anamnesis)는 어쩌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지식과 경험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반성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속에서 인간은 그동안 각자 지니고 있었던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 진리를 향한 여행의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메논>의 노예는 자유민이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도움을 받아 면적이 절반인 정사각형을 무리 없이 구현해낸다. 반면 <에우티프론>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며 신에 대한 경건(hosion)을 강조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당해내지 못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기는 어린 노예 소년도 할 수 있지만 충분한 언어와 판단 즉, 이성(logos)적 능력이 확보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내가 독립적인 자유인임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 상기

상기는 인간의 학습에는 단순한 누적이 아닌 도약과 각성의 차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처럼 성공에 도움이 될 만한 유명 소피스트라면 집이라도 팔아 사사(師事)하려 했고, 모든 일에 경쟁의 논리를 도입했으며, 승리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사회적 성취를 교육의 최우선 목적으로 삼았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플라톤은 실제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리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양상은 매우 심오한 것임을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사실 이와 같은 상기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내가 독립적인 자유인임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이며 그 자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자유는 나에 대한 모든 외부의 규정 또한 근본적으로는 내 정신(psych?)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만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내가 빠질 수도 있는 편견에서 해방되어 진리를 탐색할 수 있는 상태가 됨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나’라는 개별 인간의 특정 정체성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내 사유의 가능성과 내면의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극복할 것을 요청했던 ‘몸’(soma)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독립적인 자유인이라는 인식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난 존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내 정신은 독립적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혼자서 하기 힘든 다양한 활동들을 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개인이 사적 존재로서 원하는 행위가 아닌 공적 시민으로서 맡아야 하는 직분(epitedeuma)에 대해서 회피하지 말고 의연하게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에서 본인이 맡아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빚지고 있는 공동체 사람들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때로는 ‘악법도 법’이라는 식으로 오독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7권에서 철학자가 기꺼이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가 동굴 밖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끌어내려 하는 장면을 조금은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교육자가 매일 똑같은 길을 가야 하는 이유

진리를 깨우친 철학자들은 여간해서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꿈꿨던 것처럼 지혜로운 자들의 섬에서 유유자적하며 현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그들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시 동굴 속 현실 세계로 들어간다. 진리를 깨친 이들이 진리에 머물지 못하는 모습은 일견 모순적이지만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버스기사들이나 기관사들의 삶을 연상시킨다. 매일 똑같은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버스와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승객 중 누가 진리라는 최종 행선지에 도달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교육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진리를 가늠할 수 있는 교사들 또한 운전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게 된다.

 

고생을 사서 하는 위와 같은 생활방식은 나 하나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고, 철학자·지식인이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던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민본주의자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아카데메이아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자신도 ‘말뿐인 사람으로 비추어질 것을 우려’하며 직접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80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실현 가능한 차선 국가를 제안했던 플라톤의 모습은 교육자가 지녀야 하는 올바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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