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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선생님의 팔찌

 

올해로 12년 차인 나는 여전히 3월의 설레는 마음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개학식 전날에는 잠을 못 이룬다. 때로는 악몽 아닌 악몽을 꾸기도 하고 1-2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깬다. 어떤 해엔 심지어 꿈속에서 시험 감독을 한다. 시험지를 들고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평소처럼 시험 준비를 하며 어려운 수학 시험을 볼 거라고 나에게 투정을 부린다. 복도 쪽에 앉아있는 아이들부터 시험지를 차례로 나눠주는데, 손에 들고 있는 시험지를 아이들 수에 맞춰 나눠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족하다고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외쳐댄다. ‘이거 어쩌지? 시험 시작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이마에 땀이 맺히고 심장은 터질 듯이 쿵쿵 뛴다. 그 순간 눈이 떠져 시계를 보면, 시간은 새벽 3시.

 

하지만, 이번 해는 달랐다. 개학식 전날이 긴장감보다는 감사하고 설레는 마음이 더했다. 선생님으로서 만난 첫 학생들이 띠동갑인 닭띠생의 밝은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었는데, 어느새 쉼 없이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 새로운 닭띠생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과 몸과 마음을 맞대며 함께 지낸 짧지만 긴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첫 마음을 가지고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한번 만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마음과 다르게 학교 수첩은 ‘정호’의 이름으로 알알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샘, 정호가 이유 없이 머리 때렸어요.”
 “선생님, 정호가 급식 줄 안 서고 새치기했어요.”
 “샘, 큰일 났어요. 정호가 사과를 지훈이에게 던지다 복도 창문을 깼어요.”

 

우리 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 주인공인 긴 다리에 선하지만 장난기가 그득한 얼굴의‘정호’. 처음에는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힘이 세지는 정호가 친구들에게 힘자랑을 지나치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면서 땀도 흘리고 친구들과 협동할 수 있는 농구를 시켰다. 새치기라도 하는 날엔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성문과 친구들에게 ‘질서를 잘 지키자’라는 구호를 외치게도 했다.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쏟을 시간에, 나는 정호의 이름을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부르고 남아서 상담하고 지도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어느 날 우리 반 학생의 어머니가 아이들 지도하시느라 고생이 많다고 직접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통화 중에 자신의 아이가 ‘정호’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친구였고 이웃에 살고 있다고 하셨다. 어떤 연유인지 잘 모르지만 ‘정호’가 부모님과 관계가 좋지 않아 중학생이 되어 더 거칠게 행동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 날 방과 후에 시간을 내어 정호를 불러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속마음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 정호에게 난 지난번 겨울 방학 연수 때 배운 타로 카드를 펼쳐 보였다.
“정호야, 선생님은 내 생각대로 일이 잘 안되거나, 마음이 힘들 때 타로 카드를 꺼내. 카드가 전해주는 의미를 통해 힘과 조언을 얻기도 해.”
“물론 다 믿진 않아. 그래도 좋은 건 좋은 의미대로, 안 좋은 의미는 조심하라는 충고로 생각해. 지금 정호의 마음이 어떤지 카드 세 장 골라 볼래?”
정호는 처음 보는 별이 가득한 까만색의 타로 카드들의 뒷면을 유심히 보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골랐다.
“음...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화가 나고 속상해하는 것 같아. 맞는 것    같아? 미래는 본인 하기에 달려있으니까 정호에게 맡길게.”


“집에 가면 뭐해? 학원가니?”
“그냥 집에 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일하시니까, 혼자 있겠네. 혼자서 심심하지 않아?”
“안 심심해요. 초코랑 놀아요.”
“초코가 누구야?”
“저희 집 개요. 저희 집에서는 초코만 저 사랑해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정호의 대답에 내 가슴이 추 하나를 올린 듯 묵직해졌다.
“그렇구나, 선생님도 어렸을 때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 키웠었는데, 어머니가 어느 날 말도 없이 엄마 친구댁으로 보내버려서 울은 적이 있어.”

 

정호랑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 보니, 정호의 어머니가 훌륭하신 분이지만,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꾸 사고 치는 정호에게 지치셔서 잔소리를 멈추시고, 아버지가 화가 나시면 매를 드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얼마 전 읽은 책 속에서 인용된 조선 후기의 문인 ‘유한준’의 글이 떠올랐다. 첫 마음으로 다시 만난 나와 같은 닭띠생의 아이, 덩치는 크지만 마음속에 자신이 사랑하는 강아지 한 마리와 외롭게 서 있는 정호가 새롭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정호가 사고 칠 때마다 지도하는 대신, 꾸준히 점심시간 10분과 방과 후에 ‘미니 상담’시간을 만들어 같이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읽고 간식도 먹으면서 말로 요약하는 시간을 가지며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2학기가 되니, 정호는 자신의 속마음도 잘 이야기하고 수업도 조금 더 집중하고 친구들과도 즐겁게 지내는 듯 했다.
 

어느 날 5교시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된 지 5분쯤 지났을 때, 보건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정호가 머리를 너무 많이 아파하다 운동장에서 잠시 쓰러져 보건실에서 쉬고 있는데,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병원에 보내라는 말씀이셨다. 정호 어머님에게 급히 연락드리자, 직장에서 일하다가 바로 나오셔서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가셨다. 그날 저녁 늦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다행히 C.T촬영하고 MRI까지 했는데 뇌에 큰 이상은 없다고 하루 정도 집에서 쉬게 하신다고 어머니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사가 아닌 담임 선생님으로서 그 아이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고민했다.


‘나쁜 일은 막아주고 건강에 좋은 천연 원석 팔찌! 가족에게 선물하세요!’
얼마 전 별다른 관심 없이 인터넷 팝업으로 뜬 광고가 떠올랐다.
원석 팔찌에 관해 조사해 보니, 천연석들은 각각 다른 의미와 효능을 지니고 있어서, 잘 조합해서 만들면 건강에 도움을 주고, 행운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이 아닌 건강식품처럼 효과가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병에는 효과가 있으면 플라시보 효과라도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다소 철없지만 틀린 것도 아닌 생각이 들었다. 바로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정호를 위한 맞춤형 팔찌를 만들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천연석들과 피아노 줄을 주문했다. 주문한 지 이틀도 채 안 되어 저녁 6시쯤에 물건들이 도착했다. 마음에서 오는 병일 지도 모르는 정호의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준다는 장미 수정과 자수정을 번갈아 가며 꿰고, 혈액순환에 좋다는 반짝거리는 은회색의 헤마 타이트, 나쁜 일을 막아준다는 호랑이 눈을 닮은 호안석, 모든 돌 들의 에너지를 조화시키고 증강 시킨다는 백수정을 섞어 실에 구슬 꿰듯이 한 알 한 알 하얀 피아노 줄에 꿰어 팔찌를 완성했다.


점심시간에 정호를 불렀다.
“정호야, 왼쪽 손 좀 내밀어봐.”
“왜요?”
“샘이 선물 하나 주려고.”
 아이의 왼쪽 손목에 완성한 팔찌를 껴주었다.
“앞으로 아프지 말고 좋은 일만 생기라고 선생님이 직접 만든 팔찌야.
  귀찮겠지만 열심히 차고 다녀.”
아이도 자신만을 위한 팔찌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웃는 모습에 내 입가에도 큰 미소가 걸렸다.

 

정호에게도,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내가 만나 온 아이들에게도, 앞으로 내가 만날 아이들에게도, 류시화 시인의 ‘나무의 시’에 나오는 나무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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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교단수기 공모 은상 수상자 수상 소감

그날의 삶과 생각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 행복

 

맏형, 큰언니 노릇을 하던 초등학교 6학년의 모습 대신, 새 교복을 입고 새 친구들 다양한 교과의 선생님들을 만나 약간의 긴장감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과 새 학기 준비로 바쁜 한 주를 보내고 토요일 아침 책상에 앉아 수상 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교단 수기 공모전에서 생각지도 못한 큰 상을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제 하루하루의 삶과 생각들을 진정성 있는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기 시작했고, 그 마음을 용기 내어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 이렇게 다른 이들과 글로써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큰기회로 변하여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아이들과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교사로서의 삶이 드러나 있기에 뽑아주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소년 자살 1위, 청년층의 우울증 및 공황 장애 증가라는 어두운 사회 현실 속에서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인 Rudolf Steiner처럼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맞이하고 사랑 속에서 교육하며 자유 속으로 보낼 수 있는’ 교과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좋은 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 아이들에게 밝고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눈에 띄진 않지만 미래의 희망을 키우기 위해, 묵묵히 낮은 마음으로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하고 계시는 모든 선생님들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멋진 여러분이 아이들의 인생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슈퍼스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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