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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사랑의 허망함을 느낀 화가 들라크루아

사랑하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별을 준비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변하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던 화가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사랑을 갈구했다. 그가 끊임없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잘생긴 외모도 크게 작용을 한다.


들라크루아의 유년기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누나의 보호 아래 성장하지만, 누나는 경제적 능력이 없어 재산 관리에 실패해 파산하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들라크루아의 삶은 고단했지만, 많은 친척 덕에 사교계의 진출은 쉽게 이뤄진다. 우아하고 섬세하면서도 남성미가 흐르는 수려한 외모, 세련된 매너로 사교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철저히 사랑과 예술을 분리했던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지속시키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사랑에 솔직했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어떤 관계가 되었든지 사랑을 우선시했던 들라크루아는 직업여성들과 모델들 그리고 하녀들과 끊임없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여인들에 대한 불만과 만족이 계속되었고 그는 점점 사랑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한다.


들루크루아는 많은 여인을 사랑했지만, 특히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이 조세핀이다. 그들의 연인관계는 3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조세핀은 들라크루아를 처음 만났을 때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비록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을 정도로 부부처럼 살았다. 질투와 애증의 관계를 뛰어넘어 우정의 관계까지 갔던 조세핀도 그의 곁을 지켰지만 들라크루아와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가정부였던 제니 르 기유일 것이다. 모델로 그리고 정부로 들라크루아의 욕구에 의해 신분이 바뀐 그녀는 곁에서 그의 사랑의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사랑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고 싶어 했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젊은 날의 열정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한다. 남동생의 하녀를 유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외설일기>는 여인들에 대한 기다림과 사랑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 그리고 육체의 쾌락을 담고있다. 육체적 쾌락에 집착했던 들라크루아는 많은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의 예술에 영향을 끼친 여인은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술과 사랑을 분리시켰다.


 

여성의 이중성을 표현한 <격노한 메데이아>
여자의 이중성을 표현한 작품이 <격노한 메데이아>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아손의 아내이자 마법사 메데이아의 이야기 중 여인의 잔혹함을 표현했다.


메데이아가 남편에 대한 불신과 질투로 복수를 위해 아이들을 무참하게 칼로 찌르려고 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에서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보다는 질투에 눈이 먼 여인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 들라크루아의 육체 표현이 매우 충실하게 나타나 있다.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메데이아와 두 아이의 모습은 더욱더 강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메데이아의 아름다운 육체와 잔인한 행위가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처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묘사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가 지식인과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이 작품은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서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이며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다.


여인은 프랑스대혁명 당원이 쓰던 붉은 모자 프리지아를 쓰고,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삼색기는 1789년 루이 16세가 봉기군의 적청색 모표를 자신의 흰색 문장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는 여인이 들고 있는 삼색기는 자유·평등·박애를,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 미래를 상징한다. 여인은 자유의 여신을 상징한다. 고대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은 화면 앞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에게 느껴지는 잔인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들라크루아는 지식인으로서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도 관심이 많았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당대의 역사가 예술의 주제가 된다. 역사적 사실을 그린 작품이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다. 이 작품은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일어난 그리스 독립전쟁을 그렸다.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일어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미솔롱기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집트와 오스만의 연합군이 도시로 통하는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는 데 성공하면서 미솔롱기를 수비하던 사람들은 기아로 죽기 시작한다. 그런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그리스인들은 포위 작전에 대항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 오스만과 이집트의 수중에 들어간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는 비록 그리스가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그리스인들의 이상은 승리했다며 동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스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림은 항복을 의미한다. 여인 뒤에 머리에 터번을 쓴 남자가 군기를 땅에 세우고 있다. 남자의 당당한 자세는 승리를 나타내며, 터번과 검은 피부는 이집트 병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화면 오른쪽 아래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보이는 손은 이집트와 터키의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도시를 폭발하고 죽은 그리스인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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