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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끝판

박인기의 말에게 말걸기

모든 일은 끝판에 진경(眞境)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운동경기이다. 결국은 경기의 끝판, 그걸 보려고 관 중이 몰려드는 것이다. 경기 과정의 치열함도, 감동의 연출도, 선전 분투의 미덕도, 그 경기의 끝판과 더불어서 비로소 그 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끝판이 중요하기로는 ‘잔치’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성대하고 휘황찬란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잔치의 끝판이 싸움판이 되어버렸다면 말이다. 그런 잔치는 안하기만 못하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감동적 사랑은 끝판에 드러난다. 1926년 발간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집 <님의 침묵>에는 모두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 88편의 첫 작품이 ‘님의 침묵’이고 맨 마지막 작품이 ‘사랑의 끝판’이다. 첫머리 작품은 ‘부재하는 님’을 향한 슬픔과 그리움을 나타내고, 맨 끝의 작품 ‘사랑의 끝판’은 ‘돌아오는 님을 맞는 벅찬 기쁨’을 토로한다. 이 시집이 담은 시 정신의 총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님의 침묵’만 보아서는 안 된다. 맨 끝에 있는 ‘사랑의 끝판’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해가 말하는 님과의 사랑, 그 사랑의 진경은 ‘사랑의 끝판’에서 더 절절하고 여실하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순정으로 시작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어찌하여 치정(癡情)으로 끝판을 보인다면, 앞에 놓였던 순정의 이야기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랑이 감동을 줄 리 없다. 끝판은 이렇듯 중요하다.

영화를 보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끝판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간다. 끝판은 보지 말라고 한다면 누가 영화관을 찾아가겠는가.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의 끝판은 아마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끝없이 바깥 세계로 나가기만 하는 여행은 영원한 미완성의 여행이다. 여행은 마침내 돌아오는 끝판을 가짐으로써 그 여행이 어떤 의미를 드리우는지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어느 순간 골몰하고 어느 순간 열심을 다하는 것도 끝판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유종지미(有終 之美)란 말이 바로 그런 뜻 아니겠는가. 끝판의 아름다움이 그 일 전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것 아니겠는가.

비판의 끝판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끝판이 중요하다는 것이 인간사 모든 일의 법칙이라면, 비판도 끝판이 중요하다. 비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판은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사리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정신 활동이다. 이처럼 ‘비판’은 일종의 ‘덕목’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학교는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동서양의 철인(哲人)들은 ‘비판을 실천으로 행할 것’을 가르쳐 왔다.

비판이 ‘의미 있는 실천’이 되려면 비판도 그 끝판이 중요하다. 우리들 개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비판 행위의 끝판은 대개 두 가지 양태이다. 하나는 그 비판에서 ‘나’는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판에서 ‘나’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나’가 빠지는 경우를 들여다보라. 비판 을 확장하면서 나의 비분강개(悲憤慷慨)는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나는 정의감 넘치는 심판자가 되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그 누군가를 심판하고 정죄(定罪)하는 자가 되어 분노의 화염을 퍼붓고 있지는 않는가. 오로지 나의 의로움을 만끽하면서 그 누구를 통쾌하게 징벌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도 포함되는 경우를 들여다보라. 비판을 내 안에서 심화시키면서, 비판의 중간 과정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어떤 통찰이 일어나지 않는가. 비판의 끝판에 이르러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도록 나를 이끌어 가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이 비판 안에 나 자신도 들어있음을 깨닫게 되지는 않는가. 이 비판 안에서 나에 대한 투명한 성찰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지는 않는가. 비로소 비판은 말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임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는가. 

나는 후자가 옳다고 본다. 더구나 교육에서는 그러하다. 마땅히 성숙한 비판은 그 비판에 기꺼이 ‘나’도 포함되어야 한다. 내가 무언가 비판을 하고 있지만, 그 비판이 내게로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 그런 비판일수록 감정에 지배되기 쉽다. 비판이 감정이 지배되면 그 때 비판은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지르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 배설은 그렇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잠시 후련한 기분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내가 퍼부은 모욕 못지않은 모욕을 이번에는 내가 뒤집어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 소통 생태이다. 우리가 인터넷에 악성 댓글로 해대는 비뚤어진 비판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가볍고 가벼워서 그래서 아예 책임의식 같은 것을 동반할 기본 장치마저도 주어지지 않는 비판의 플랫폼이 요즘의 악성 댓글 비판이다. 악플이 악플을 낳고 그 모욕에 분노하면서 더 센 악플을 날리는 모습이 인터넷 악성 댓글의 민낯 아니겠는가. 내 악플에 대한 남의 악플에 모욕을 느끼기 이전에,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러고 있는 나’를 내 스스로 혐오하는 씁쓸한 자기 모독을 먼저 느낄 것이다.

사실 악성 댓글을 비판이라고 끼워주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다르게 말하면 ‘소통 복지’가 망가진 사회이다. 나는 소통 의사가 있어도 이런 댓글 판에는 들어가 참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슈가 중요해도 소통을 포기한다. 소통 환경도 일종의 복지 개념으로 보아서 개선해야 한다면 이 는 분명히 ‘소통 복지’의 인프라를 망가뜨 리는 행위이다.

악성 댓글도 비판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비판의 윤리 측면에서 볼 때 비판의 축에 들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 걸로 비판의 주인인 양 우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모욕의 가래침을 상대의 얼굴에 뱉어대고 동물적 희열을 느끼는 저급한 복수심의 적나라한 모습의 인터넷 악성 댓글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이성(理性)이라곤 없었던 양, ‘뚜껑 열린 광기’로 치졸한 감정의 소모전을 무한히 펼치는 곳이 악성 댓글의 공간이다. 이를 정치적 힘의 근거로 이용하려는 작태가 생겨나면서 악성 댓글은 세상을 오염시킨다. 특정한 인물을 겁박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이들 모두가 ‘진정한 비판을 죽이는 사회’에 톡톡히 기여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비판은 그 자체로 정의인 양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거슬러 올라가기로 말하면 정치권력이 부 도덕한 데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서, 비판은 절대선인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거세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처럼 인정받았다. 그런 비판이 사회적 공감을 얻어서 실제적인 권력을 얻기도 한 다. 민주사회에서 있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비판은 그 자체가 현실적 선택과 책무를 져야 한다. 그 비판이 추구한 바가 구체적 현실이 되기도 하고, 그 비판이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되기도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기 책임이 발생한다. 알다시피 현실 참여에서는 절대선 또는 절대 덕성으로서의 비판은 없다. 비판은 또 다른 비판과 상호삼투(相互 滲 透)되면서, 서로 지양(止揚)되면서, 보다 나은 대안을 찾아나가는 것에 그 긍정의 기능이 있는 것이다. ‘상호삼투’니 ‘상호지양’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의 실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비판과 다른 비판이 만나는 과정에 서 각기 자기비판을 겸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니 각기 자기비판을 통해서 ‘상 호삼투’니 ‘상호지양’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비판이 정치적 스킬의 일종이 되면서, 비판을 쇼하듯이, 보여주기 위해서 비판을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비판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이들을 비판의 끝판에서 무엇을 생각하게 할 것인가. 이념의 호위 무사를 만드는 것이 비판 교육의 할 일은 아니다. ‘비판하는 자기’를 보게 해야 한다. 나는 이 비판에서 자유로 운가. 그걸 보게 해야 한다. 적어도 교육은 그러해야 한다. 자기비판을 상정하지 않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 비판의 윤리란 무 엇이겠는가. 그 비판 안에 자신도 반드시 포함시켜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 비판의 끝판에다 두는 것이 비판의 원리다.

한때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개개인의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게 하는 화두로써 전 국민에게 감화를 주었던 ‘내 탓이오’ 운동 이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나를 비판하는 데에 이르게 함으로써 비로소 비판은 성숙하게 그리고 윤리적으로 완성된다. 비판의 끝판은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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