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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미국 남부에서 가장 길고 깊은 벅스킨 협곡

세계로 떠난 남녀

캠핑카 여행을 하며 미국 유타 주에 있는 커내브라는 마을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아니야, 여기도 없어.”
해가 진 후 우리는 마을 곳곳을 돌며 도둑놈처럼 기웃기웃 염탐을 했다.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작은 마을의 이 구석 저 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돌기 시작한 지 여덟 바퀴 만에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여기서 와이파이가 터져!”



캠핑카일 경우 그날의 잠자리를 좌지우지하는 건 화장실의 존재 유무다. 그래서 휴게소 화장실 근처가 차숙을 하기에 딱 좋다. 하지만 화장실과 부엌까지 딸린 캠핑카에서 없는 건 딱 하나, 문명인의 필수품 와이파이다. 우리나라처럼 인심 후하게 무료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드물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어쩌다 동네 한두 개쯤 비밀번호가 없는 와이파이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은 운 좋게 코인 세탁소 옆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퇴근하듯 이 공터로 돌아온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코딱지만한 마을에 나흘씩이나 머물고 있는 이유는 ‘더 웨이브(The Wave)’라는 관광지 때문이다. 쉽게 떨어져 나가는 사암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루에 딱 20명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곳이다. 10명은 인터넷을 통해 사전 신청을 받고, 나머지 10명은 매일 아침 9시에 이 마을의 인포메이션 센터에 직접 방문한 사람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 결정된다. 인터넷 신청은 수개월 전에 미리 해야 하고, 현장 제비뽑기는 매일 아침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몇 백 명까지 모인 사람들 중에 딱 10명만 당첨의 행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하루 20명의 규칙이 얼마만큼 엄격한가 하면, 제비뽑기로 뽑는 10명 중 8명이 뽑힌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뽑힌 그룹의 인원수가 3명이라면 그 중 2명만이라도 갈 것인지 그룹원 모두가 포기를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할 만큼 인원 제한에 대한 규칙은 칼같이 지켜진다. 그만큼 웨이브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온갖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




다행히 커내브 주변으로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 브라이스 캐니언(Byace Canyon), 앤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 등 유명한 관광 지역들이 몇 있어 우리는 커내브를 기점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동시에, 매일 아침 9시면 인포메이션 센터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네 번째 도전의 날 아침, 맥없이 캠핑카 문을 밀어젖혔다. 오늘도 떨어진다면 깨끗이 웨이브를 포기할 작정이었다.


커내브 협곡에서 만난 거친 자연의 숨결
어, 못 보던 자동차네? 우리 캠핑카 옆에 나란히 주차된 빨간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차창 안쪽엔 구겨진 배낭과 버너, 먹다 남은 빵 봉지와 찢어진 신문지,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와 진흙 묻은 등산화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무질서한 물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꿈틀대더니 이내 자동차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깜짝이야! 침낭? 아니, 누에고치에서 애벌레 기어 나오듯 본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꾀죄죄한 침낭 사이에서 40대 중반의 깡마른 사내가 툭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제각각 승천할 듯 치솟아 있고, 양 볼은 퀭하니 말라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5살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내였다. 말간 그의 눈과 마주친 내가 멋쩍게 웃고 있는 사이 반대편 문 너머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걸어 나왔다.


스티브와 브라이언. 형은 LA에, 동생은 뉴욕에 살고 있는 쌍둥이 형제는 웨이브에 가보기 위해 몇 년째 함께 휴가를 맞춰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우리 넷은 ‘혹시나 오늘은···’ 하는마음으로 제비뽑기에 도전했지만 역시나 오늘도 두 팀 모두 실패. 이쯤에서 그만둘지, 좀 더 머물며 도전할 것인지 T 군과 열띤 논쟁을 벌이는 사이 형제가 다가왔다.


“우리는 오늘 ‘벅스킨 협곡(Buckskin Gulch)’으로 트레킹을 하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목숨 건 트레킹, “난 운좋은 사람”
벅스킨 협곡? 처음 듣는 지명이었지만 양 엄지를 추켜세우며 정말 멋진 곳이라고 부추기는 말에 형제를 따라나섰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 채···. 벅스킨 협곡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긴 협곡이다. 총 20km에 달하는 긴 협곡은 경험이 아주 많은 베테랑 트레커들조차 마음 놓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10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라는 것을 트레킹을 하고 난 후 알게 되었다. 협곡 전체를 왕복하려면 2박 이상의 캠핑을 병행해야 하지만 우리는 당일로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 체격의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비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평소엔 마른 협곡이지만 약간의 소나기라도 내리면 협곡 사이로 빠르게 물이 차올라 금세 급류가 휘몰아치는 계곡으로 바뀐다 했다. 앞뒤 양옆 어느 곳으로도 급류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사실 익사해서 죽는다기보다는 센 물살에 휩쓸려 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사망하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이 코스에서 목숨을 잃은 트레커들도 다수 있다는 스티브의 설명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적어도 오늘은 비 소식이 없다며 안심시키는 그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자이언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과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 등 캠핑카 여행을 하며 둘러보았던 자연들은 모두 세상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형세를 자랑했지만 벅스킨 협곡이야말로 최고봉이라 할 만 했다. 협곡이라는 점에서 앤털로프 캐니언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 더 투박하고 거칠어 그야말로 오지에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홍수에 떠내려온 자갈 무더기를 지나 비온 후 채 마르지 않은 진흙땅에 푹푹 빠지며, 여기저기 협곡 사이에 끼어버린 커다란 돌과 나뭇가지를 온몸으로 기어 넘다보니 어느새 우리의 몰골은 거리서 몇 달 쯤 헤맨 부랑자의 꼴과 유사해졌다. 오늘 아침, 스티브 형제를 보았을 때의 딱 그 모습이다.



한껏 구부린 양팔과 몸통은 W자를 유지한 채 양 손바닥으로 협곡 벽을 꼭꼭 눌러 짚으며 안쪽으로, 안쪽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절벽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위로 인해 깊게 팬 곳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물살이 흐른 방향대로 빗살 무늬가 선명한 곳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느껴지는 듯했다. 직각으로 쭉 뻗은 절벽을 따라 고개를 치켜드니 조각난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캠핑을 하며 침낭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은 더욱 예술이라며 으쓱대는 스티브. 사실 말이 캠핑이지 침낭 하나에 몸을 맡긴 비박을 즐긴다고 했다. 맨몸으로 대자연에 누워 바라보는 은하수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그 광경을 직접 본 그의 양 어깨가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였다.



트레킹을 마치고 캠핑카로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생전 처음듣는 지명이었지만 들끓는 호기심이 이끌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벅스킨 협곡. 우리는 그 이튿날 거짓말처럼 더 웨이브 제비뽑기에 당첨 되었다. 불행히도 스티브와 브라이언 형제는 이번에도 실패였다. 하지만 커내브를 떠난 며칠 후 스티브도 웨이브에 당첨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벅스킨 협곡에서 살아나온 걸 보면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 틀림없나 보다.


 세 단어로 알아보는 벅스킨 협곡 


1. 커내브(Kanab)
커내브는 콜로라도 평원 서쪽 해발 1,515m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캐납과 캐납 주변의 캐년에서 서부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다수 찍은 까닭에 유타의 작은 할리우드라고도 불린다. 대표적으로 역마차(1939), 딜론 보안관(1955), 엘 도라도 (1966), 무법자 조지 웰즈(1976), 론 레인저(2013) 등이 있으며, 커내브에서 2시간 내 거리에 있는 캐니언만 꼽아도 그랜드캐니언 노스림, 자이언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과 더불어 벅스킨 협곡을 포함하여 앤털로프 캐니언, 더 웨이브 등이 있다. 말 그대로 캐니언의 요충지!


2. 캠핑카 여행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재밌는 여행 방법 중 하나가 캠핑카 여행이다. RV(recreational vehicle)라고 불리는 캠핑카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시설, 침대, 냉장고, 샤워실 겸 화장실, 식탁 테이블, TV 등이 구비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캠핑카의 가장 큰 매력은 멋진 대자연 속에서 식사와 숙박이 가능하다는 사실. 캠핑카만 있다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는 꿈의 여행’을 현실화할 수 있다. 기간과 크기에 따라 가격대는 다양하지만, 보통 하루에 10~15만 원선이면 4인용 캠핑카를 렌트할 수 있다.
•캠핑카 렌트 업체 www.cruiseamerica.com


3. 벅스킨 협곡 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갈 경우 보통 라스베가스로 들어가며(약 12시간 비행), 라스베가스에서 커내브 마을까지는 자동차로 약 3시간이 걸린다. 이번 편에서 소개한 벅스킨 협곡은 89나 89A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닿을 수 있으며, 유타주의 커내브에서 50여 분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