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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저항하라

진정한 독서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독서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 ‘독서에 저항하기’, 그 또한 독서에 참여하는 한 방법이다. 그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독서 주체를 제대로 확립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서에 저항하는 동안 독서와 반대편에 있는 온갖 대중 엔터테인먼트 문화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도 함께 저항할 수 있는 기제가 생기게 되어 있는 법이다.

01
“독서를 하라.” 이 말은 그 의미가 너무도 자명(自明)해서 더 이상 풀어서 재미있게 설명을 하기도 어렵다. 효도해라, 부지런해라, 저축해라, 시간 아껴 쓰라. 등등의 말이 다 그러하다. 이미 말 자체에서 스스로 분명한 의미와 이치가 드러나는 것이어서, 오히려 섣불리 강조하거나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따분해 한다. 아이들은 더 그렇다. 그래서 독서를 강조하면 할수록 “뭐야! 또 그 소리, 맨날 하는 소리!” 이런 반응을 얻기에 딱 좋다.

독서 가치가 타성에 빠진 탓이다. 독서가 신선한 충격을 주는 가치로 다가가기는커녕, 흔해 빠진 잔소리 정도의 가치나 될까 말까. 뭐 그런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이나 잘 하시오. 뭐 그런 반응을 얻기가 십상이다. 효도 가치나 근면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치가 사람들을 각성시키기는커녕 어떤 타성으로 굳어져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렇게 타성에 빠지게 된 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독서야말로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 겉으로는 독서 중요한 걸 모두 인정한다. 문제는 말로는 많이 떠들어도 막상 진지하게 독서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데에 있다.

이런 세태를 풍자하여 누군가 고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 것이 있는데, 은근슬쩍 수긍이 가기도 한다. 고전, 그것은 자기는 안 읽으면서 제자나 후배에게는 읽으라고 권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또한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안 읽은 책을 읽은 척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한다. 이는 독서 가치가 일종의 허영으로 떠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책 읽기 싫어하는 풍토이니 허영심으로라도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청소년기에는 지적 허영심을 건드려서 독서의 동기를 길러주기도 하고, 독서로 길러진 지적 허영심을 보다 높은 다른 차원의 독서로 제압하기도 한다. 만약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것은 일종의 선순환이다.

02
인간은 대체로 자명한 것들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다. 그것이 너무 밝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어리석다. 동어반복 같지만 자명한 것들이 우리에게 각성을 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과 공기와 햇빛의 존재와 가치가 가 저리도 자명할진대, 그렇게 자명한 동안에는 누가 그 유익과 고마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낄 것인가.

그러면 어느 때 그 유익과 고마움이 우리에게 또렷하게 각성될 수 있는가. 물과 공기와 햇빛을 부정해 보거나, 그것에 대들어 볼 때에야 비로소 그것의 의미가 제대로 각성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자명한 것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저항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모든 위대한 학습은 대체로 그러하다. 자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타성으로 끌려가는 동안 나는 나의 진정한 대상(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자명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냥 무의식중에 각성 없이 받아들인 삶의 원리들이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내 삶의 원리가 되기 어렵다.

독서의 가치가 자명한 것이라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독서를 싫어하면서도, ‘독서하라’는 정언에 막상 저항하지도 못한다. ‘독서하라’는 말에 정색을 하고 대들지도 못한다. 아니 대들 수도 없다. 독서에 저항하라니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타당하고 옳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독서의 가치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 가운데 독서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서의 가치를 그냥 타성처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독서에 진정으로 주목할 수 없다. 그저 막연히 독서가 중요하다고 여기면서도, 평생을 독서에 대한 끝 간 데 없는 무관심과 불감증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소년들도 독서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독서와 권태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들 모두 독서에 대해서 한 번도 저항하여 대들어 본 적이 없는, 아니 시도조차도 아니 해 본 사람들이다.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잊혀져버린 사람이라고 했던가. 독서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실천하지 못하고, 독서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독서로부터 잊혀져버린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독서로부터 소외된 사람’이다. ‘독서’가 어떻게 ‘사람’을 소외시킨단 말인가. 생각해 보자. 독서는 한 개인의 책 읽기이기도 하지만,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독서 문화를 이룬다. 누군가가 독서로부터 소외된다고 했을 때의 독서, 이때의 독서는 ‘문화’를 의미한다. 독서로부터의 소외는 문화로부터의 소외를 불러 온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에 무기력하고 독서에 불감증인 사람들이 독서를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독서가 그들을 소외시킨 것이 된다. 독서로부터의 소외는 개인에게는 정신의 자폐와 추락을 유도한다. 독서를 소외시킨 사회는 가치 없는 것들이 가치 있는 것들을 내몰고, 그 사회의 공동선을 허물어 버린다. 문화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양태를 천박한 것들로 획일화 한다. 시민들의 정신적 활력을 퇴행시켜서 마침내 황폐하게 만든다.

03
독서에 저항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학창 시절 청소년용 위인전 읽기가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리라. 위인전이 재미없는 이유를 딱히 무어라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위인들이 너무나 위인답다는 데에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인전을 다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이런 것이다. 위인들은 왜 위대할까. 위인들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동어반복의 허탈함이 자주 비집고 들었다. 위인전 읽기의 맛이 너무 밋밋하여 맹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인전 읽기에 대한 이러한 불만에 대해서 나는 한 번도 저항해 보지 않았다. 물론 지도하시는 선생님도 위인전에 저항할 기회를 한 번도 주시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위인전 읽기가 따분해졌고, 어쩔 수 없는 숙제가 아닌 한, 내가 다가가서 읽지는 않는 쪽으로 변해 갔다. 위인전 읽기에 대한 저항이 보장되었더라면, 따분하지 아니한 위인전에서 진짜로 나와 코드가 잘 맞는 위인을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독서 행로나 인생행로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독서에 저항하는 것도 독서를 지지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경험이다. 이것 역시 책과의 왕성한 소통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준다. 우리가 독서의 가치를 우상화 하는 동안 아이들은 독서의 동네를 떠나서 다른 영역으로 가 버렸다. 독서에 저항하기는 독서로부터 떠나간 아이들을 다시 찾아오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어찌 아이들뿐이겠는가.

우리는 독서에 저항하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즉 다음과 같은 독서지도를 해 본 적이 없다. 다듬어진 생각은 아니지만 몇 가지 활동을 떠올려 본다. 책 읽기가 왜 싫은지에 대해서 오래 탐구하고 발표해 보는 활동,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를 온갖 방법으로 정당화 하고 옹호해 보는 활동, 독서에 대해서 월등히 재미있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흥미 우위를 당당하게 경험적으로 비교해 보는 활동, 독서 숙제 대신 해 보고 싶은 체험 활동을 제안하고 실천해 보는 활동, 내가 읽은 책 중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책을 혹독하게 비판해 보는 활동, 나쁜 내용으로 독후감 쓰기 활동, 서점의 책값과 일반 물가 비교해 보기 활동, 책 읽는 대신으로 출판사 놀이하기 활동, 교과서 글 중에 가장 읽기 싫은 글 선정하기 활동 등등. 이런 활동들은 정말 독서에 해롭기만 한 활동들일까.

독서에 저항하기, 아직은 낯선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의 무기력한 독서 불감증으로부터 탈출하는 지혜로 삼을 수는 없을까. 진정한 독서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독서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 ‘독서에 저항하기’, 그 또한 독서에 참여하는 한 방법이다. 그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독서 주체를 제대로 확립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서에 저항하는 동안 독서와 반대편에 있는 온갖 대중 엔터테인먼트 문화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도 함께 저항할 수 있는 기제가 생기게 되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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