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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불량 유머 3종 세트

자격 있는 유머는 일종의 창작 작품과도 같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를 부지런히 실어다 나르는 사람은 유머의 소통에 기여하는 바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유머의 향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참신성 있는 좋은 유머는 내가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만드는 ‘나의 유머’이다. 이런 유머는 나의 사람됨을 잘 담아내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유익하고 따사롭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진부한 결론 같지만, 좋은 유머의 근원은 부단한 독서이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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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은 파리의 경관을 망친다는 이유로 에펠탑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막상 에펠탑이 완공되자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모파상에게 에펠탑이 싫다면서 왜 여기서 식사를 하냐고 물었다. 모파상이 대답했다.

“파리 시내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유일한 곳이 여기니까요.”

이런 유머에는 지적인 향기가 가득하다. 에펠탑을 반대하던 그가 정작 에펠탑을 매일 찾게 되는 자기모순을 유머로 승화시킨다. 싫다던 에펠탑을 매일 찾는 행위에는 자신의 생각이 수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고백이 숨어 있다. 그 고백을 ‘에펠탑이 안 보이기 때문에 찾아온다.’는 말로 슬쩍 숨기듯 드러내듯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파리 시내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유일한 곳이 에펠탑이 서 있는 곳이란 이야기는 맞다.

그러나 이는 궁한 변명의 성격이 강하다. 고백과 변명이 나란히 조화롭게 들어 있는 데서 이 유머의 매력은 고양된다. 에펠탑을 좋아하기로 했다는 숨은 고백은 고백대로 반감(反感) 없이 수용되고, 변명은 변명대로 자적 광채를 드리우며 여운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유머는 인간의 모순을 따뜻하게 감싸 안게 한다.

이번에는 조지 부시의 유머를 하나 들추어 보자. 재임 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모교인 예일대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다.

“우등상, 최고상을 비롯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둔 졸업생 여러분,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C학점을 받은 학생 여러분께는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폭소와 박수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부시 대통령은 아마도 그날 망가지기로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다. 예일 대학 시절 자신의 성적이 C학점이었음을 이 유머 속에서 고백한 셈이다. 우수 졸업생 이외의 다수 학생들이 대통령의 이 유머 한 마디로 마음에 흔연한 즐거움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아니, 어떤 소망 같은 것을 그날 제대로 품었음직도 하다.

권력자의 성공적인 유머는 자신의 망가짐을 기꺼이 드러내는 데서 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권력자라고 해서 굳이 대통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도 가만히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알게 모르게 권력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꼭 갑과 을의 계약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 내게 아주 조금이라도 신세를 지고 있는 관계이면 나는 그에 대해서 권력자인 것이다.

유머는 나를 망가뜨려 상대를 힘내게 하고 상대를 즐겁게 하는, 인간 이해의 진정성이 들어 있는 배려의 언어이다.

말이 나온 김에 영국의 유명한 수상 처칠의 유머 한 가지만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처칠 수상이 의회에서 어느 여성 의원과 심한 논쟁을 벌였다. 흥분한 여성 의원이 차를 마시는 처칠에게 말했다.

“당신이 내 남편이었다면 틀림없이 그 찻잔에 독약을 넣었을 것입니다.”
처칠은 웃으면서 응수했다.
“당신이 만약 내 아내였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차를 마셨을 것이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라면 ‘살인 선동’ 운운하며 거칠고 가파르게 언성을 높여 맞대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처칠은 자신에 대한 극단의 불신과 증오에 대해서 가파른 감정으로 응수하지 않고, 자신은 신뢰와 사랑의 마인드로 임하고 있음을 이렇듯 천연덕스럽게 유머의 언어로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격정의 갈등을 지혜롭게 누그러뜨려 간다. 험악한 싸움으로 번질 기세를 진정시켰지만, 이 싸움에 숨은 승패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칠의 완벽한 승리가 단연 돋보인다.

여기까지는 일단 ‘우량 유머 3종 세트’라 명하기로 하자. 유머는 단순한 재치가 아니라 엄청난 내공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 내공이 어찌 언어적 수련과 지적 내공으로만 된 것이겠는가. 도덕성 내지는 인성의 내공이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막말과 대척되는 자리에 유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막말의 천적(天敵)이 바로 유머 언어이다. 정치인에게 막말은 그 자체로 악덕이고 유머는 그 자체로 미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 토막의 유머 삽화는 분명 ‘우량 유머 3종 세트’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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