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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막말, 그리고 좀비(zombie)

악성 댓글로 지배할 수 있는 여론은 없다. 건강한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공간 자체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막말이 지배하는 인터넷 공간이 여론을 주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극단에 매몰된 사람들의 착각이다. 인터넷에 나타난 감성 여론에서는 늘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선거에서는 지는 현상이 이를 잘 입증한다. 악성 댓글로 도배가 되는 인터넷 공간은 마치 좀비들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1. 오늘날 만연된 욕설언어현상은 괴물과도 같다. 특히 청소년의 욕설 행태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 괴물을 대할 때의 당혹감을 가지게 된다. 괴물은 정체가 모호하다. 오늘날의 욕설과 막말은 그 정체(正體)가 쉽사리 구명되지 않는다는 점, 무섭게 번져나가서 그 위세가 걱정스럽고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괴물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욕설현상을 어떻게 한 칼에 처치해 버릴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점, 궁극에는 선량한 사람들 다수가 속절없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괴물과 흡사하다. 더구나 이 괴물을 은근히 즐기고 편드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처럼, 욕설과 막말을 즐기고 편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 오늘날의 욕설·막말 현상이 참으로 괴물의 속성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된다.
더 그럴싸한 비유로 말하면 ‘욕설과 막말의 만연’은 ‘좀비(zombie)의 준동’처럼 느껴진다. 좀비는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말이다. 좀비는 호러와 판타지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좀비는 ‘인간을 적대시하는 몬스터’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완전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 타인에게 조종되거나 생전의 생물적인 본능과 반사행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많다(위키 백과사전). 오늘날 청소년들에게서 행해지는 욕설과 막말의 모습이 그러하다. 좀 더 정확하게 대응시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드러난다.
첫째, 지저분하고 비속한 욕설과 심한 막말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아무런 죄의식이나 반성적 자각이 없다. 마치 영혼이 뽑혀 버린 좀비처럼 행동한다. 욕하는 아이들은 바른말 사용은 애써 외면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악령에 조종을 받는 것처럼, 욕설과 막말의 도가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침없이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 좀비가 밝고 선한 것을 일부러 외면하면서 어둡고 나쁘고 음습한 것에 탐닉하며 선한 영혼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다.
둘째, 욕설과 막말을 하는 동안 증오와 단순화된 공격성 행동을 주저 없이 표출한다. 이런 양태를 보이는 아이들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하노라면 좀비의 무섭고 찌그러진 표정이 연상된다. 욕설중독의 아이들이 실컷 제 좋아하는 욕설에 탐닉하면서도(좀비들이 시종일관 충동적 죽음의 욕구를 추구하면서도), 마음의 위안이 없고 감정의 자극과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좀비나 욕설언어의 사용에서나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셋째, 멀쩡한 사람을 자신과 같은 부류로 끌어들이기(남과 같은 부류가 되기 위해서) 위해서 일부러 욕설과 막말을 한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또래 의식이 욕설언어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욕설행위를 공유함으로써 확인하고 쾌감까지 가진다. 좀비들이 함께 몰려다니면서 선량한 인간을 하나라도 더 좀비로 만들기 위해서 해 보이는 행태와 유사하다.
 
2. 욕설과 막말은 모두 한통속의 언어이지만, 욕설은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서 쓰는 말이고, 막말은 마구 함부로 쓰는 말이다.
막말을 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막말은 내가 내 감정을 못 이겨서 터져 나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말은 이성 실종의 상태, 불합리로 가득 찬 말의 모습, 아니 그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막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더라도 그때의 막말에 담긴 감정 노출이 정당한 것이라고 동의해 주기는 어렵다. 오갈 데 없이 천박한 것이 막말이다. 물론 하고 난 뒤의 후유증도 엄청나게 크다.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 말할 것도 없이 막말을 휘둘러 댄 본인 자신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이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복원되기보다는 막말 쪽으로 점점 더 중독되어 갈 가능성이 많다.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둘러대는 자녀를 부모가 준열하게 꾸짖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준열하게 꾸짖는다는 것의 방법을 지혜롭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엄하게 야단친다고 해서 막말로 야단을 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겠다”라고 한다든지, “너 같은 놈은 나가 죽어라”고 말한다든지 하는 것은 폭력과 다를 바 없는 막말이다. 자녀에게 화가 난 한국의 어머니들이, 그 감당할 수 없는 좌절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이참에 아예 너 죽고 나 죽자”라고 말하는 경우는 막말로 치면 극치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막말로 핏대를 올릴 때의 그 일그러진 표정은 얼마나 악마적인 표상으로 자녀들의 뇌리에 남겠는가. 자녀를 불러 놓고서 이런 식의 막말을 들이대기보다는 차라리 자녀와 함께 상당한 침묵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울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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