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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안'이 품고 있는 우리의 역사

신라의 나라이름에서 온 ‘서울’과 고구려 평양성의 이름에서 왔을 ‘장안’이 합쳐진 ‘서울 장안’이라는 말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너무 앞서간 것인가.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이름은 신라 시대에는 북한산군이었고 고려시대에는 한성(漢城)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한양(漢陽)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다시 한성이라고 불리었다가 1910년 일본이 국권을 강탈하면서 경성(京城)으로, 해방된 후에는 현재 명칭인 ‘서울’로 바뀌었다.

경주를 가리키는 서벌’에서 기원
‘서울’이라는 말은 <용비어천가>(1447) 49장 “셔 드러 님그미 나갯더시니(서울에 도적이 들어 임금님이 나가있으시더니)”라는 구절에 ‘셔’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셔 ’은 같은 시대의 자료인 <월인석보>(1457)에 이미 ‘셔울’로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대개 ‘셔울’로 실현되고 있어서 15세기에 이미 ‘셔 >셔울’로의 변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셔울’이 지금과 같은 ‘서울’의 형태로 쓰이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에 와서의 일이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간혹 ‘셔울’과 ‘서울’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는 했지만 입말에서는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서울’로 통일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셔 >셔울>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경주(慶州)를 가리키던 ‘서벌(徐伐)’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서 일연은 <삼국유사>(1285)에 ‘신라’의 국명(國名)에 대한 설명 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두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초기 나라이름은 ‘徐羅伐’이고 다른 이름으로 ‘徐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徐伐’이 나라의 중심 도시, 즉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던 고려 말에까지도 세속에서는 ‘경(京)’의 훈(訓)을 ‘徐伐’이라고 했음을 말해 준다. 이 기록은 또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 즉 개경(開京)을 세속에서 수도(首都)를 ‘徐伐’로 부르던 신라의 전통에 따라 ‘徐伐’이라고 했음을 말해 준다. 고려 당시 ‘徐伐’에 대한 발음이 ‘셔’에 가까웠을 것은 <용비어천가>를 통해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울의 또 다른 이름, ‘설성’의 어원과 설화
한편 이러한 변천을 거친 순우리말, ‘서울’에 대한 한자 표기는 이미 <증보문헌비고>(1790)에 ‘徐(당시에는 ‘셔울’로 읽음)’이라는 기록이 있었고 ‘서울’을 달리 이르는 말로 ‘설성(雪城)’이라는 말도 있었음을 <동국여지비고>(1870)와 같은 우리 옛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성(雪城)’은 <동국여지비고>의 선바위 일화에 나오는 말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서울 성곽을 ‘설성(雪城)’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고 현대의 <표준국어대사전>(1999)에서도 이를 그대로 인정해 ‘설성(雪城)’을 표제어로 싣고 ‘한성(漢城)의 옛말’로 풀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동국여지비고> 속의 조선 초 도성 건설에 관한 설화를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도성을 만들 당시인 14세기 후반의 사건에 대한 설화와 ‘설성(雪城)’이라는 지명이 뜬금없이 19세기 후반의 지리지에 갑자기 나타나게 된 점을 믿기 어렵고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다른 기록들에서 ‘서울’을 ‘설성(雪城)’이라고 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설성(雪城)’이라는 말의 어원을 ‘서울’이 줄어든 말인 ‘설’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지금도 입말이 활발하게 기록되는 인터넷에서 ‘서울’을 흔히 ‘설’로 표현하고 있는데 ‘서울’을 ‘설’(물론 이때의 ‘설’은 길게 발음된다)로 표현하는 것은 방언에서는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이미 19세기 언저리에는 ‘서울’을 ‘설’로 줄여 말하면서 ‘서울성’을 입말에서 ‘설성’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화돼 ‘서울성(城)’을 ‘雪城’으로 기록하게 됐다. 여기에 유추해 무학대사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불교와 유교의 대립을 극적(劇的)으로 표현하는 설화가 덧붙어서 <동국여지비고>에 남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수도에서 비롯된 ‘장안’
수도(首都)라는 뜻의 ‘서울’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장안(長安)’이라는 말이 있다. 장안(長安)은 본래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의 옛 이름으로 옛 한(漢)나라의 도읍지였고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옛 수도 이름인 장안이 수도(首都), 즉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은 멀리 고구려 평원왕 때부터이다. 이미 정약용이 <아언각비(雅言覺非)>(1819)에서 밝힌 바 있지만 장안성(長安城)은 고구려 평양성의 별칭이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427년)인데 이 당시의 평양성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다. 그러다가 현재의 평양 시가에 해당하는 지역에 양원왕(陽原王) 8년(552년)부터 장안성을 쌓기 시작해서 586년(평원왕 28)에 안학궁에서 장안성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 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장안’으로 불리었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던 ‘셔’을 여전히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가리키는 말로 썼던 것처럼 고구려의 수도였던 ‘장안’도 우리말의 어떤 용법에서는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면면히 사용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우리나라 문헌에서 ‘서울’을 ‘장안’ 혹은 ‘쟝안’으로 지칭하는 표현은 18세기 후반의 <경신록언해(敬信錄諺解)>나 <박씨부인전>, <츈향뎐>과 같은 이야기 책들에서 주로 등장한다.
이 ‘서울’을 가리키는 뜻의 ‘장안’이라는 말은 ‘온 장안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라든지 ‘온 장안에 떠들썩한 사실’, ‘장안 최고의 갑부’, ‘장안의 화제’, ‘장안의 명물’, ‘장안이 들썩거리다’와 같이 우리말의 관용적인 용법 속에서 쉽게 확인된다. 특히 이 ‘장안’이라는 말은 ‘서울 장안에 소문이 나다/자자하다’에서의 ‘서울 장안’같은 합성어로 실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두 말이 모두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서울 서울’이라는 뜻이다.
‘장안’이 막연히 중국의 수도라는 뜻으로 쓰였었다면 이러한 용법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의 나라이름에서 온 것이 확실한 ‘서울’과 고구려 평양성의 다른 이름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 ‘장안’이 합성어를 이룬, ‘서울 장안’이라는 말에서 우리말과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너무 앞서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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