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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너의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크든 작든 ‘복수’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몰입의 극한으로 이끄는 마력을 가진 복수를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인간은 치명적 오류의 골짜기로 빠져들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경박하게 외치는 이 사회에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알릴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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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2002년에 만든 작품이다. 송강호, 배두나, 신하균 등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로서, 개봉 당시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물론 평범한 복수 이야기로 그런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관객들 마음이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복수의 내용과 행위가 악마적이고 끔찍했었다. 특히 복수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끝없이 연장되는 복수의 악연에 질려버릴 것 같은 삶의 모진 인과들에 지치게 된다고나 할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주연 격인 배우 송강호씨도 시나리오를 받고서 출연을 세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을 극장 간판에서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게 대단한 복수 이야기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한 선지식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영화 제목에서 느껴지는 언어적 직관 같은 것이었다. 우선 명사구 형태의 이 영화 제목이 주는 독특한 인상에서 복수 의지의 단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복수는 내가 한다”라고 한다든지, 또는 “그 복수를 나에게 맡겨라” 라고 문장투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독하고 강한 복수 결의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이 말이 자꾸만 내 기억의 뇌수를 건드렸다. 이전에 어딘가 어디선가 한번 조우를 했던 말처럼 다가왔다. 희미한 기억의 가닥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맞다. 성서의 여러 페이지에서 간간히 맞닥뜨렸던 말이다.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로마서 12장에 기록된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냥 가져다 붙인 제목이 아니다. 성서라는 고전의 족보에 코드를 대고 있고, 그 고전 성서의 언급을 다시 살짝 패러디해 비틀었으니 인문학적 세련미를 더 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복수는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복수의 주체가 되지 말아라. 그런데 굳이 그에 맞선다. 복수를 신에게 맡기지 못하겠다. 내가 해야만 하겠다. 그런 인간의 모습이 상정된다. 그는 극한의 분노의 자리에서 심판의 소명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생각한다.
그래서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표명하는 순간 “내가 신이다”를 전제하는 모습이 된다. 이 대목이 섬뜩한 대목 아니겠는가. 의미심장한 패러디의 경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영화 제목도 고전 인문학의 훈고와 주석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경지에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제목을 보는 순간 범상치 않다고 여겼던 내 직관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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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도 소통의 일종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가치중립적으로 설명하면, 복수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현상이니 그것 역시 일종의 소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쁜 소통도 소통은 소통이라는 이야기이다. 복수를 소통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감정을 지니고서 좋든 싫든 소통하고 있는 실제적 상대를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나 직장이나 시장이나 정치판에서 복수하고 싶은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면서, 또 그 대상을 상대로 소통해 가면서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복수할 상대를 소멸시키기까지는 어떤 형색으로든 소통이 놓이는 것이다. 끔찍한 복수가 저질러지는 행위 그 자체를 소통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과 경로는 분명 소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사실과 논의의 층위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대부분의 복수는, 특히 끔찍한 복수는 소통의 단절이 빚어낸 결과라는 점이다.
복수가 소통의 일종인 것은 복수의 일상성을 들여다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는 복수라고 하면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일상 모두를 버리고 일대 사건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다룬 복수들이 주로 그런 복수만 보여 주었기 때문에, 복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통념화한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복수는 목숨을 살라버리는 복수, 평생을 편집광적으로 몰두해 상대를 파멸시키고 나도 파멸되는 복수를 그린다.
그런데 그것만이 복수는 아니다. 상대에게 나쁜 일이 생기기를 바라며, 그 나쁜 일을 내가 만들어 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것이 복수이다. 그 나쁜 일이란 것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는 상관이 없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어도 복수이고, 상대의 신발을 감추는 자질구레한 사건이어도 복수는 복수이다.
복수는 그 감정의 작용만 두고 말한다면 일종의 몰입 기제를 가진다. 복수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려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몰입의 감정이란 대단한 것이다. 오죽하면 ‘복수일념(復讐一念)’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생기기까지 했겠는가. 사소한 복수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해치려고 신발을 숨기는 행위도 반드시 몰입을 수반하면 복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몰입이 없으면 그저 장난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보여주는 정신적 몰입의 가장 극단에 있는 것 두 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살펴본 대로 ‘복수’라는 감정이 몰입의 극한을 가져다준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이 모두 몰입의 영토에 의탁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몰입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몰입을 감염시킨다. 그러니 우리를 감동으로 빠지게 하는 명작들의 단골 모티프가 사랑 아니면 복수인 것은 당연하고도 남는다. ‘복수’와 ‘사랑’, ‘사랑’과 ‘복수’, 이들은 인간 심리작용의 양극단에 있는 감정이다. 양극단은 잘 통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너지면 복수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복수가 가 닿는 허망의 극단에서 다시 사랑이 피어나기도 하는 걸까. 자식을 죽인 사람을 다시 아들로 삼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따뜻한 가슴으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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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인간은 네 가지의 치명적 오류의 골짜기로 자신을 몰아가게 된다. 복수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모든 일상의 일들이 오로지 ‘복수’로 환원되며, 복수로 통하게 된다. 무슨 일을 해도 이것이 모두 복수를 위한 과정이나 수단으로 떨어지게 된다.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그래서 불쌍하다. 삶의 다른 요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한다. 불구적 삶이다. 삶의 총체를 상실하는 오류, 이것이 첫 번째 오류이다.
복수를 마음먹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이 복수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이르면, 되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너는 셈이 된다. 망상에 가까운 자기 합리화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운명의 울타리에 갇히면 세계를 왜곡되게 해석하고 인간 일반을 불신하게 된다. 소통을 스스로 차단해 소외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 감정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자신을 정의의 사자 정도로 객관화시킨다. 이것이 두 번째 오류이다.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우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상대에 대한 증오감을 키우는 것이리라. 복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때로는 필요 이상의 증오감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증오감의 강화는 증오 이외의 다른 감정을 죽여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기쁨, 사랑, 공감, 즐거움 등의 여러 감정들을 다 죽여 놓고 증오감만을 키워 가면, 균형 있게 느끼고 판단하는 힘을 서서히 잃어 갈 수밖에 없다. 감정의 불구자, 차갑고 어두운 얼굴의 소유자가 된다. 세 번째 오류이다.
복수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복수의 마음을 제 삼자에게 들켜서는 아니 된다. 복수의 달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복수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부터 이제는 부단히 자기 자신을 거짓되게 드러내어야 한다. 잘 알다시피 누구를 속이는 일을 정당화 하다 보면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문제는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내가 모른다는 점이다. 네 번째 오류이다. 그런데 이 점을 남들은 잘도 알아차린다. 바로 이 때문에 복수 사건은 쉽사리 범인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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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구체적으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 안에서만 일어나는 복수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좀비와 같은 것이어서 교육이 책임 있게 다루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세상인지 선생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더러는 있다고 한다. 참을성 없는 세태에서 그 경박하고 화끈한 것을 추종하는 감정의 좀비들이 퍼뜨린 나쁜 씨앗인지도 모르겠다. 복수가 마지막으로 망가뜨리는 대상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는 과정이 인생이다. 이걸 어떻게 한 마디로 가르쳐 주나.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생겨나는 사회는, 무너져서는 안 되는 많은 것들이 무너진 사회이다. 복수는 칡넝쿨보다도 더 복잡한 계기 구조를 가지면서 확장되어 간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 바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 준다.
모든 복수가 다 성공한다면, 복수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결심하는 순간, 그 누군가가 나를 향해 더욱 단호하게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마음먹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연결고리란 것이 그러하다. 복수의 생태학이 그러하다. 인간이 하는 복수는 기껏 그 수준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말을 신(神)이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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