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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2015 교단수기 은상>내일 함께 아침을


인문계 고교의 학기 초 학생 면담은 대부분 장래희망이나 학업에 대한 고충, 희망 대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뒤 가볍게 고민이나 학교폭력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20여분 정도면 끝나곤 한다.

5년 전 4월 면담 마지막 날, 내겐 한 학생과의 잊지 못할 만남이 있었다. 7교시 마지막 자율학습 시간, 미영(가명)이와 시작한 면담은 특별했다. 작은 키에 마련 몸매, 얌전한 성격의 미영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머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가끔 이해가 되면 필기도 했지만 잘하는 과목은 별로 없었다.

장래희망은 공예가였는데 막상 물어보니 공예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중학교 미술시간에 했던 색종이 바구니 짜기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공예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예술적 재능이 커 보이진 않았다. 성적에 대해서도 별반 할 말이 없었다. 대학 진학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했다. 딱히 싫어하는 것도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고민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때 마지막 차례인 다른 학생이 재촉하며 교무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 그렇게 면담은 끝나가는 듯했다. 적어도 미영이가 불쑥 충격적인 말을 던지기 전까지는.

“참, 저 죽고 싶어요. 작년에 칼로 손목도 그었어요.”

그 말은 처음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단순히 오늘 날씨가 덥다느니, 사과가 제법 익었다는 정도의 시답잖은 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못들은 척 하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러나 내 속은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그 전에 우리학교 1학년 학생이 지하철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자살 이유는 찾지 못했다. 학생들은 그렇게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떠나가 슬픔만 남기곤 했다.

그 찰나에 수십 가지 생각을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엄청 심각하게 대해주어야 하나? 못들은 척 해야 하나? 상담 선생님께 인터폰을 돌려 보았다. 인터폰 부저음만 길게 울렸다. 섣불리 말하면 안 된다. 아이 상황을 충분히 알아야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를 읊어 댔다가 울어버리거나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살려 놓아야 한다. 내일 아침 일찍 상담실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게 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을 채워서였을까? 나는 기껏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저기 건너편 파리 바게트 샌드위치, 안 먹어 봤지? 죽더라도 그건 먹고 죽어야지. 선생님이 내일 사올게. 7시 반에 꼭 와.”

죽고 싶다는 사람 앞에서 빵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죽기 전에 빵을 먹어야 한다니. 내가 말해놓고도 뜨거운 것이 얼굴에 끼얹어지는 느낌이었다. 난 당황했다. 의외로 그 여학생은 순순히 내일 온다고 말하고 일어섰다. 여학생이 교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지만, 우리 아이는 별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날은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저녁은 느릿느릿 밤이 돼 갔고 밤은 그대로 멈춘 채 새벽이 오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딱히 면담을 공부한 적도 없었고 죽음에 대해서 깊게 고민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나는 뭐라고 말 하고 그 아이를 자살 충동에서 건져내야 하는 걸까?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평균 이하인 그 여학생만의 장점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행복한 미래를 제시할 자신도 없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명쾌하게 이끌어 줄 자신이 없었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고 싶은 그 여학생이 살아야 할 간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7시 반 교무실에서 나는 내 마음 어딘가에서 미세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장송곡 소리를 애써 무시해가며 여학생을 기다렸다. 부모님께 신신당부했으니 하룻밤 사이에 별 일은 없겠지 마음 졸인 시간이었다. 다행히 미영이는 나타났다. 상담실과 연락이 될 때까지 나는 준비해간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샌드위치가 맛있어서 어제의 고민을 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상담결과는 다음 날 나온다고 했다. 어떤 결과든 전문 상담교사가 아이의 자살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을 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내가 해야만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하루 종일 내 마음 속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는 깊게 깊게 굴을 파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적어도 나는 오늘은 살아야 한다. 오늘 아침 그 아이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무언가 눈빛이라도 마주쳐야 하기 때문에 살아야 했다. 나는 지금부터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아이는 지금부터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그 이틀 동안 아이가 살아 있나 심경의 변화는 없나 유심히 살펴봤다. 검사결과는 다행히도 자살 위험군이 아니라고 했다. 상담실로부터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은 학생이라는 소견서를 받았다. 자살 증후군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는 왜 죽고 싶다고 말한 것일까? 내 마음속에서 깊은 고민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미영이와 아침을 먹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내일 먹을 음식 종류를 고르거나 새로 나온 피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죽고 사는 문제를 피한 채 계속해서 먹는 이야기만 해댔다.

2주 후 자연스럽게 중간고사 출제 기간이 돼 미영이는 더 이상 교무실에 들어 올 수 없게 됐고 우리의 아침 식사는 끝을 맞았다. 다시 평범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 다음해에도 자살 위험군 명단에 미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졸업했고 대학 진학은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부모님 일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 후로 나는 일 년에 서 너번 ‘혹시 죽고 싶다면’이라는 말을 수업시간에, 종례시간에 슬쩍 꺼낸다.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게, 그리고 잘 들리게. 그리고는 새로 나온 치킨은 나랑 먹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죽고 싶다면 마지막 식사는 선생님과 해야 하는 거라고 재미없는 농담을 한다.

죽음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에게 죽고 싶다는 여자가 찾아왔다. 그 여자의 일생은 너무도 기구했다. 죽음을 말릴 수도 없었다. 작가는 사연을 털어놓고 돌아가는 여자를 배웅해 줬다. 길모퉁이에서 헤어질 때 여자가 “선생님께 배웅을 받다니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자 작가는 “제 배웅이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지 말고 살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혹시나 마지막 식사를 청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이유가 정말 자살을 하고 싶어서이건, 정말 치킨을 사 주는가 궁금해서이건, 미영이처럼 관심을 끌고 싶어서이건 상관없다. 식사를 하면서 죽고 싶은 그 아이의 인생을 나눌 참이다. 5년 전 아침, 미영이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나눌 수 있으면 아무것이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것이 물질이든, 정이든, 서먹함이든, 기구한 인생이든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것이면 다 좋다. 나누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식사를 마쳤으면 나는 맛있었냐고 물어 볼 것이다. 누군가가 맛있었다고 대답한다면 너는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후로 영원히 소식을 몰라도 상관없다. 졸업 후 영원히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너도 궁지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우리 서로 그렇게 죽지 말고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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