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절, 인각사에서 만난 일연스님

2020.10.12 11:42:34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선덕여왕은 죽음이 임박하자 신하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고 했다. 도리천은 불교에 나오는 여러 하늘 가운데 하나다. 그런 곳이 지상, 신라에 있을 리가 만무한데 그런 부탁을 하니 신하들은 당연히 그 장소를 다시 왕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그 장소를 ‘낭산 남쪽’이라고 얘기한다. 낭산은 황룡사 옆의 나지막한 산. 신하들은 낭산 남쪽이 도리천인지 의심이 갔지만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든다. 
 

이야기는 문무왕 때로 이어진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자 당은 신라마저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이 사실을 당에서 유학하던 의상대사가 알아채고 급하게 귀국해 문무왕에게 알린다. 당이 50만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 왕을 비롯해 신라는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한다. 이때 적을 물리치는 비법을 가지고 온 명랑스님에게 이 일을 부탁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에 명랑스님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미 당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명랑스님은 다시 말하기를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지으셔도 된다’고 얘기한다.

 

사천왕사와 망덕사 이야기

 

비단으로 절의 모양을 두르자 명랑스님은 12명의 승려와 함께 ‘문두루 비법’을 썼고 바다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게 된다.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나자 처음 명랑스님과 약속한 것처럼 정식으로 절을 짓고 ‘사천왕사’로 이름 붙인다. 나중에 당은 이 절이 신기함을 알고 사신을 보내서 몰래 염탐하게 했고 신라는 사천왕사 건너에 ‘망덕사’를 지어 그에게 보여준다. 당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들어선 사천왕사 덕분에 선덕여왕의 예언이 맞게 된다. 사왕천은 사천왕이 지키는 하늘이니 사천왕사는 곧 사왕천이다. 도리천은 그 사왕천 위에 있는 하늘이다. 
 

경주 답사를 하면서 낭산 남쪽 선덕여왕릉에 가게 되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세 가지 신비로운 예측을 한 것) 이야기에 속 도리천 일화를 들려줘야 비로소 그 아래 있는 사천왕사와 길 건너에 있는 망덕사의 존재가 이해된다. 그냥 이해만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치며, 혹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흥미진진함이 더해진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역사책이 아니라 ‘문학책’이란 주장도 있다. 실제로 ‘제망매가’, ‘서동요’, ‘처용가’ 등 14수의 향가가 있어 노래로 고대의 정서를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도 ‘삼국유사’는 독보적이다.
 

한국 고대사를 이해할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서로 보완하며 우리의 지식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곳이 바로 군위의 인각사(麟角寺) 다. 편찬자는 널리 알려진 일연스님, 보각국사다. 하지만 인각사, 그리고 일연스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어느 책이든 그 책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책을 짓고 편찬한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함에도, 일연스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이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늘, ‘삼국유사’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일연스님의 일생을 인각사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연스님은 9살 어린 나이에 불가에 입문한다. 설악산 아래 진전사다. 이후 여러 절을 옮겨 다니며 승과에 장원급제하며 삼중대사의 지위에 오른 뒤 현풍 비슬산의 보당암, 주문암, 묘문암에서 머문다. 이렇게 같은 산에서 거처를 옮기게 된 배경에는 당시 몽골의 침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전국을 휩쓸던 몽골군의 살상과 파괴를 피하고자 했으리라. 그러던 중 남해의 정림사로 옮겨간다. 지금 남해군 고현의 정림사터는 고려시대 ‘분사대장도감’이 있던 곳으로 추정한다.

 

분사대장도감은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곳이다. 그러니 일연스님은 여기서 일정한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 외적의 침략으로 위태로워진 나라에 대한 관심, 기록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후 강화, 개경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가 다시 비슬산의 인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청도의 운문사로 옮긴 다음, 마지막 자신이 머물 공간으로 인각사를 선택한다. 인각사에 머무는 5년 사이, ‘삼국유사’가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로서 마지막 삶은 효를 선택

 

청도 운문사 시절, 일연스님은 이미 나라의 큰 스님이란 국사가 됐는데 자리에서 물러나길 간청해 인각사로 왔다. 이때 일연스님의 나이가 78세였는데, 어머니의 품을 떠나 절에 들어간 지 70년이 되는 해가 된다.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인 경산 근처인 인각사에서 95세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출세간, 세속을 떠나야 했던 승려가 됐지만 승려로서 마지막 삶은 효를 선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각사에서 채 1년이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게 된다. 아마도 그 짧은 순간을 어머니와 일연스님은 서로 다르게 평가했을 것이다. 
 

4년 뒤, 인각사에 머물던 일연스님도 입적하게 된다. 제자들은 승탑을 세울 자리를 고민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자리를 일연스님이 직접 정했다고 하는데 절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이는 조금 드문 일이다. 현재 일연스님의 내력을 적은 탑비, ‘보각국사 정조지탑’이 남아있는데 이는 인각사 안에 있다. 보통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는 승탑과 승려의 일생을 정리한 비문이 담긴 탑비는 붙여 세우거나 가까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일연스님이 부도의 자리를 정한 이유는 조금 특별했다. 일연스님이 생각하기를 ‘나는 죽으면 제자들이 기리겠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나밖에 없으니 내가 돌아가게 되면 누군가 기릴 사람이 없게 되는 것’에 이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의 부도를 마치 반사경처럼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절에서 저녁에 석등에 불을 올리면 그 불빛이 일연스님의 승탑에 닿고 그 불빛은 멀리 떨어진 일연스님의 어머니 무덤에서 볼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배치돼 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등불을 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무덤과 빛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각사에 남은 흔적을 통해 일연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보면 ‘삼국유사’의 구성이 다시 보이게 된다.
 

‘삼국유사’는 9편의 주제를 5권의 책에 담았는데 그 제목은 역사책치고는 조금 낯설다. 9편 제목을 살펴보면 왕력, 기이, 흥법, 탑상, 피은, 의해, 신주, 감통, 효선이다. 이 구성을 다시 내용에 따라 구분해보면 왕력과 기이, 두 편은 역사 기록에 해당하지만 흥법 이하 효선까지는 불교와 관련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목차를 구성함에 과거 다른 책의 편제를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흥법 이후 불교 관련 이야기는 중국의 ‘고승전’과 같은 부분이 있어서 참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승전과 다른 부분이 있으니 맨 마지막 부분인 ‘효선’ 편, 효도에 대한 이야기다. 효선 편은 학생들을 위한 이야기책 등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5편으로 진정스님 이야기, 김대성 이야기, 향득 이야기, 손순 이야기, 효녀 지은 이야기다. 역사 기록으로서도, 불교의 교리로 볼 때도 조금은 색다른 효도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하지만 인각사 답사를 하면 그 의문은 조금 풀린다. 일연스님 삶의 마지막을 담은 인각사는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한 해제(解題)의 역할을 한다. 아쉽게도 인각사는 십수 년 전부터 중창 공사를 하고 있다. 공사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절의 분위기가 휑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다. 도로 옆에 인접한 것이 큰 원인이겠지만 건물과 석물의 위치도 원래 모습을 벗어난 곳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 큰 법당인 극락보전은 고려 시대였다면 절 뒤, 언덕 북쪽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또 탑비는 임진왜란의 화재와 많은 이들이 왕희지 글씨를 얻기 위해 탁본을 하는 바람에 아주 일부만 남아있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일연스님의 승탑 역시 절 마당으로 옮겨와 보존에 있어서는 다행스럽지만, 한편으로 원래 위치는 아니니 그 건립 내력에 얽힌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 그래도 인각사는 여전히 인각사이며 일연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삼국유사’를 주제로 답사를 한다면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사실, 인각사를 안고 있는 화산은 풍수로 보면 원래 상상 속 동물인 기린(麒麟)을 닮은 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린 뿔의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어 인각사가 됐다. 인각사는 역사를 살피는 안목을 기르며 상서로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뻔하지 않은 경주 즐기기_신유림(神遊林) 낭산

천마총,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은 우리가 경주를 여행할 때 꼭 방문하게 되는 장소들이다. 그러다 보니 수학여행이나 가족 여행에서도 한 번 이상은 다녀오게 된다. 경주를 여러 번 여행하면 같은 장소가 아닌 색다른 곳을 가보고 싶어진다. 그 구미에 맞는 곳이 바로 신유림이라 불린 낭산이다. 낭산은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에 위치한 약 100m 남짓한 나지막한 산으로 삼국유사에도 여러 번 등장하며, 신라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신라인에게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던 만큼 낭산에는 수많은 신라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낭산 추천코스 ①신문왕릉 ⇒ ②망덕사지 ⇒ ③사천왕사지 ⇒ ④선덕여왕릉 ⇒ ⑤능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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