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도시 사비도성의 흔적, 부여에 가다

2020.08.31 09:42:03

 

2015년에 새로운 세계유산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공주, 부여, 익산의 8개 고고학 유적(공주: 송산리고분군·공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부소산성·능산리고분군·부여나성, 익산: 미륵사지·왕궁리 유적)이 여기에 해당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백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이들 유적에 대한 유명세가 모두 같지는 않아 보인다.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고분군이나 무왕이 지은 미륵사지, 그리고 5층 석탑이 있는 정림사지처럼 유명한 곳도 있지만 조금 덜 알려진 곳도 있다. 관북리 유적이나 부여나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이들 유적은 무령왕릉처럼 화려한 유물이나 절터의 탑처럼 눈에 띄는 지상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부여에 답사 온 사람들도 놓치기 쉽다. 그렇지만 역사 유적도 사람을 보는 것과 같아서 모두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잠시 눈을 돌려 관북리 유적과 부여나성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전과 다른 부여, 그러니까 사비도성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여 답사를 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같은 도읍지인 부여와 경주의 직접 비교는 조금 곤란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경주의 경우 ‘삼국사기’ 기준으로 992년 동안 신라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그에 비해 부여는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니 그 격차가 크다. 단순하게 기간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성기 존재 여부, 도굴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도 고려의 대상이 돼야 한다.

 

예를 들어 경주의 주요 유적은 대부분 통일 전쟁 이후 전성기로 평가받는 문무왕~혜공왕 때 만들어진 것이다. 또 신라 초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도굴이 어려워 최근까지 전해지는 유물이 무척 많다. 하지만 굴식돌방무덤 일색인 백제의 고분은 기적처럼 살아남은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됐다. 무엇보다 경주는 견훤의 침입을 받기는 했지만 외적의 공격과 파괴가 크지 않은 도시라는 점에서 나당연합군, 그리고 신라의 영역으로 포함된 부여의 처지와 사뭇 다르다. 

 

 

‘삼천궁녀’에만 수렴해선 곤란

 

무엇보다 부여 답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선입견’, 조금 더 정확히는 ‘삼천궁녀’다. 이 낱말이 주는 메시지가 워낙 뚜렷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 관점으로 부여를 보고 백제를 보며 답사를 한다. 낙화암이 있으니 전쟁 중 희생당한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모든 것이 여기에 수렴돼서는 곤란할 것 같다. 역사 속 어느 나라건 멸망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조선의 도읍지, 서울을 보며 태조와 세종 얘기는 빼고 고종과 순종만 얘기하는 실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부여 역시 여러 내용을 두루 살펴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부여의 유적은 새로운 시선을 갖고 백제를 보는 데 도움을 준다. 
 

자, 이제 부여를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적과 연결해 다시 살펴보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부여는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가 성왕 때 도읍지로 정해 옮겨간 곳으로 당시 이름은 사비(泗沘)였다. 이 역사를 통해 웅진은 급작스럽게 옮겨온 느낌을 받지만 사비는 조금 여유롭게 선택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는 어떠할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건 538년이지만 백제 역사 속에 사비가 등장하는 건 훨씬 전이다. 약 50년 전인 490년, 동성왕이 사비원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10년 뒤인 501년, 사비의 동원(東原)과 서원(西原)에서 사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데 왕의 사냥은 상당한 정치적 행위임을 고려하면 사비가 그 장소로 이렇게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10년 사이에 사비 지역을 동서로 구분할 정도가 됐다면 무언가 그 사이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근거가 바로 부소산성과 가림성(지금의 성흥산성)이다. 
 

 

가림성은 501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이 501년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를 보내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을 쌓는 일은 사비를 도읍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백가는 결국 그해 11월, 사비로 사냥하러 온 동성왕을 시해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하는데 하나는 웅진에 기반을 둔 백가가 자신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을 한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좌평이란 고위직에 있는데 지방의 산성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는 과정에서 무령왕이 사비로 내려와 우두성에 자리를 잡는다. 이 성이 지금의 부소산성이니 501년 전에 완성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령왕은 전투 끝에 백가를 가림성에서 잡아 처형한다. 

 

여러 산성 쌓아 3중 방어체계 구축

 

백제로서는 왕이 시해되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 내용으로 백제는 최고위직인 좌평을 보내 지키게 할 정도로 가림성, 그리고 사비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사비를 도성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왕16년, 538년 사비로 천도는 이러한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로 바꿨다. 
 

그렇다면 수십 년 동안 준비한 것은 무엇일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부여나성과 관북리 유적이다. 나성(羅城)은 도시를 둘러싸는 성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한양도성과 비슷하다. 다만 전쟁이 격심했던, 그리고 도읍지의 함락을 겪었던 백제는 조금 더 방어에 관심을 가졌으니 나성만 만든 것이 아니라 3중 방어체계를 구성했다. 먼저 도성 밖에 여러 개의 산성을 쌓아 외곽의 방어선이 되도록 했다. 앞에서 살펴본 가림성을 비롯해 석성산성, 청마산성 등 수십 개에 이르는 사비 주변의 산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두 번째 방어선이 바로 나성이다. 다만, 사비는 서쪽과 남쪽으로 금강(백강)이 흐르고 있어 나성은 북쪽과 동쪽에만 쌓았다. 확인된 구간은 대략 6.3km 정도다. 그리고 도성의 마지막 방어선은 바로 도성 안쪽을 지키는 것으로 왕궁 뒤에 만든 부소산성이 최후의 보루가 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나성은 도성 방어 외에 다른 역할도 했다. 도성의 경계를 명확하게 한 점이다. 한성이나 웅진 시기에는 백제의 도읍지 영역을 명확하게 하기 어려웠는데 사비 시기에는 나성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도성의 안과 밖 구분이 명확해지니 몇 가지 흥미로운 점도 발견된다. 조선이 한양에 적용한 원칙 가운데 하나가 산 사람을 위한 도시라는 것이다. 곧 죽은 사람은 왕이라고 하더라도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으니 조선 왕릉 건설 원칙 가운데 하나가 그 위치를 도성의 10리 밖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런 원칙을 백제도 적용했다. 백제 왕실의 고분인 능산리고분군도 나성 밖에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을 나성으로 나눈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공간 나눈 ‘나성’

 

그런 점에서 나성을 세계유산에 포함했다는 점은 기억할만하다. 나성 자체가 중요해서이기도 하지만 백제의 도읍지를 이루는 요소라는 점에 더 많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여를 답사하러 간다면 몇 개의 점으로 대표되는 역사 유적을 보는 것을 넘어 도성으로서 부여를 본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나성과 더불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곳은 바로 왕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적이 역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관북리 유적이다. 그런데 관북리 유적을 왕궁으로 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꾸준한 발굴을 통해 비로소 왕궁이 있던 곳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가 35m에 이르는 거대한 건물터나 높은 관청을 뜻하는 수부(首府) 글자가 새겨진 기와, 그리고 부소산성과 넓은 평지 사이에 있는 지리적 위치 등이다. 지금 관북리 유적은 너른 공간에 여러 발굴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나무나 돌로 만든 지하저장시설도 그중 하나인데 참외나 다래, 복숭아, 살구, 오이의 씨앗이 발견되기도 해서 백제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으로 만든 길의 흔적도 있으며 수조와 토관을 이용한 수도 시설도 있어 당시 생활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부여, 성왕이 도읍지를 옮길 당시 사비도성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곽에 수십 개의 성을 쌓아 1차 방어선으로 삼고, 이후 금강과 나성으로 2차 방어선을 만듦과 동시에 사비도성의 윤곽을 만든 뒤 도성 안에는 즐비한 집과 거리, 절이 있고 그 중심에 궁궐이 있으며 부소산성이 3차 방어선이자 최후의 거점이 된다. 그리고 금강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사비의 모습을 그려내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한성이다. 한강과 제방을 이용해 도읍지의 윤곽을 만든 뒤 도성 안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밖으로는 삼성동과 아차산 등에 쌓은 토성과 산성. 
 

어쩌면 백제는 자신들 전성기의 도읍지, 불의의 공격으로 빼앗긴 한성을 그리워하며 그 역할을 대신할 곳으로 사비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사비도성, 곧 부여를 답사하면서도 백제 전체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비도성의 지금 이름, 부여는 백제의 또 다른 나라 이름이며 백제 왕족의 성씨다. 부여가 백제인 셈이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yrkim@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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