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유전적 거리는 "zero"

2006.02.01 09:00:00

DNA 분석 결과 한국인과 일본인은 형제나 다름없다는 것이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DNA 유형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과거에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파해주고 도공들이 건너간 것이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건설한 것이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흔히 쓰는 표현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인 하면 불쾌한 과거의 역사가 먼저 떠오른다. 마치 DNA에 새겨져 있기나 한 것처럼 반일 감정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한(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DNA에 기록된 2300년 전 일본사
하지만 정작 DNA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족보를 파헤쳐 보면 두 민족은 형제나 다름없다. 2300년 전쯤부터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렇게 가까운 혈족이란 것은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저 불교를 전파해 주고 도공들이 몇 백 명씩 건너갔다는 정도로 생각했지, 밝혀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 명씩 건너간 이민자들이 일본인이 됐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을 우리에게 강요했지만 이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동북아대륙의 어느 인종과도 함께 자리 매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1996년 유전자를 통해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 연구는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주도하고 한국 학자도 참여했다. 이들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DNA 뿐만 아니라 문화도 비슷해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 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 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 족, 류큐 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를 세우고 서로 경쟁하다가 마침내 4세기에 야마토(大和)라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와 야마토 시대는 한반도 이주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치권력이 들어선 야마토 시대는 고분문화 시대(AD 300∼700)라 불릴 정도로 무덤이 많은데 대부분 백제의 고분과 비슷하다.

대륙 혼란이 일본 이주사 만들어
그렇다면 한국인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2300년 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대륙은 큰 혼란의 시기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앞두고 진·초·연·제·한·위·조 7웅이 피의 전쟁을 벌이던 전국 시대(BC 453∼221)였다. 이때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는 고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 처음 등장해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중국 요녕 지방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친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 전 중국 전국 시대 칠웅의 하나인 연이 고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르는 땅을 잃고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 많은 고조선 주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뒤 삼국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4∼7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대량 인구 이동이 세 차례 있었다고 본다. 먼저 삼국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4∼5세기에 백제 북부 지역 주민들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어 5세기 후반에 백제 귀족과 한강 유역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7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망명객들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DNA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자 아키히도 일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 직전 한일 왕실 간의 핏줄 커넥션까지 공개했다. 환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환무 천황의 생모는 789년에 죽은 다카노 니이가사이다. '속일본기'는 다카노 황태후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순타 태자는 505년 일본에 파견됐다가 8년 만에 죽었다. 짧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손이 바로 일본의 황태후가 된 다카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타 태자의 후손들은 다카노 황태후가 나올 때까지 무려 270년 동안 일본 귀족 사회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산 셈이다.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총지휘한 도쿄 대학 인류유전학자인 오모토 게이이치 교수가 한국에 왔을 때 그를 호텔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100명의 일본 학자들과 여러 분야의 연구자를 총지휘하며 일본 민족과 일본 문화의 기원을 밝혀낸 중심 인물이다. 그 역시 대륙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이 일본인의 80%를 형성했고 한반도가 그 길목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도래인이 일본에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 현 도이가하마 인류학박물관에 가면 당시 묻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가까운데도 왜 말이 다를까? 현대 일본어와 현대 한국어는 단어의 유사성이 15%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다. 핏줄이 가깝다면 말도 상당히 비슷해야 하는데 서로 말이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가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의 말이 뿌리가 됐고 그 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지만, 일본어는 이미 한반도에서는 사라진 고구려 언어가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제어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른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의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일본어는 고구려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어는 기원전 400년 경 한반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로 건너와 쌀농사를 짓고 이 농사법을 일본 북부로 퍼뜨린 고구려 농민의 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국어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이두나 구결, 향찰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다. 3, 5, 7 숫자는 고구려어로는 密, 于次, 難隱로 표기된다. 이는 '미', '이쓰', '나나'로 발음되는 일본어와 비슷하다.

과거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으로
우리는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른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키가 큰 한국 사람이 일본인과 어떻게 유전자가 같으냐고 할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키가 작은 것은 환경적 요인이지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생수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생수는 칼슘성분이 한국보다 매우 적었다. 일본인이 작고 치아가 튼튼하지 못하고 뻐드렁니가 많은 것은 칼슘 부족 때문이지 유전자가 우리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일 간의 혈족 관계가 밝혀지고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두 나라가 협력하면 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만 집착해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다. 일본인도 같은 핏줄을 괴롭힌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한국도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에서 벗어날 때 한국과 일본은 피를 나눈 진정한 형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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